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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孔子)의 고향(故鄕) 곡부(曲阜)-공묘(孔廟)·공부(孔府)·공림(孔林) 탐방기(探訪記): 유교(儒敎)의 발상지(發祥地)이자 유가(儒家)의 창시자 공자(孔子-기원전 551~479년, 이름은 구(丘), 字는 仲尼)의 고향이기도 하는 곡부(曲阜)는 춘추(春秋)시대 노(魯)나라의 수도(首都)였다. 인구 10만 정도의 소도시인 곡부에는 세 개의 대표적인 공자 유적지가 있다. 삼공(三孔)이라 부르는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다. 공묘(孔廟)는 공자(孔子)를 기리는 사당(祠堂)이고, 공부(孔府)는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지역이며, 공림(孔林)은 공자의 묘(墓)와 후손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이 삼공(三孔)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기원전 478년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가 생전(生前)에 거주하던 고택(古宅)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방 3칸에 불과했지만, 중국 황제(皇帝)들이 공자의 제(祭)를 성대하게 올리면서 공묘의 규모가 점점 커진 것이다. 기원전 195년 한(漢)나라 유방(劉邦)이 최초로 공자에게 제(祭)를 올린 이래로, 12명의 황제가 친히 이곳에 와서 제사를 지냈다. 그밖에 100여 명의 황제가 196회에 걸쳐 대리인을 파견하여 제례(祭禮)를 지냈다. 공묘(孔廟)의 입구 석방(石坊)에는 금성옥진(金聲玉振)의 글씨가 있다. ‘금성옥진(金聲玉振-지혜(智慧), 인덕(仁德)을 충분히 조화 있게 갖추고 있음의 비유이다. 음악의 주악(奏樂)에 금성(金聲)이라는 종(鐘)을 쳐서 연주(演奏)의 시작을 알리고, 옥경(玉磬)이라는 악기를 쳐서 연주의 끝남을 알린다. 즉, 공자의 완성된 인격을 기리는 말로 쓰인다.’ 『맹자(孟子)』 「만장하(萬章下)」에 보면 “공자 같으신 분을 집대성(集大成)했다고 하는 것이다. 금성(金聲)이라는 소리는 조리 있게 시작하는 것이고, 옥진(玉振)이라는 소리는 떨쳐낸다는 것으로, 조리 있게 끝맺는다는 것이다. 조리 있게 시작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하는 일이고, 옥소리를 떨쳐낸다는 것은 성덕(聖德)을 지닌 사람이 하는 일이다.(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 始條理者, 智之事也, 終條理者, 聖之事也.)” 진입하는 길 양쪽에 측백나무가, 100년, 500년, 1000년 단위로 분류되어 있는데, 최고 오래된 수령(樹齡)은 1,800년이 되었다고 한다. 공묘(孔廟)는 공자(孔子)의 옛집을 사당(祠堂)으로 삼아서, 황궁(皇宮)의 규격에 맞게 건설되었다. 공묘는 북경(北京)의 고궁(古宮), 태산(泰山)의 대묘(岱廟)와 함께 중국의 3대 고대(古代) 건축물 중의 하나로서 세계 건축물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성전(大成殿)은 공묘의 주요한 건축물로 형세가 웅장하다. 대성전 앞 통로에 위치한 10개의 대리석 기둥에는 여의주를 가지고 있는 두 마리의 용(龍)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용은 중국에서 하늘과 황제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용의 조각은 황궁에만 새길 수 있는데, 공묘에 용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공자의 지위가 황제와 같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묘는 15차례 이상 보수와 중축을 거쳐 지금의 규모를 갖춘 것은 청나라 옹정황제(擁正皇帝) 때다. 총 16,000㎡ 부지에 9개의 정원과 부속 건물 100여 동, 460여 칸의 방이 있다. 남북 방향으로 630m에 걸쳐 여러 개의 문과 건물이 길게 이어진다. 중국 전역에 건축된 문묘(文廟)는 이 공묘(孔廟)를 모방해 건축한 것이다. 공묘의 규문각(奎文閣) 북쪽, 대성전(大成殿) 남쪽에 동서(東西)로 양쪽에 늘어선 13비정(碑亭)이 있는데, 역대황제가 쓴 비석(碑石)을 보존하기 위해 세운 정자로, 중요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며, 팔각 겹처마 지붕이 날아갈 듯하고 작지만 웅장하다. 13비정 안에는 비석이 55개가 있는데, 당(唐), 송(宋), 금(金), 원(元), 명(明), 청(淸), 민국(民國)시대 때 세워졌다. 비석의 문자(文字)는 한자(漢字), 만문(滿文-만주문자), 팔사팔문(八思八文-元시대 몽고문자) 등의 문자로 쓰고 각(刻)을 하였다. 공묘 안에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던 행단(杏壇)이 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은행나무 아래 야외 강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이 꺾이고 고향으로 돌아온 일흔 살의 공자는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또한 공묘의 동문문(同文門) 좌우행랑채에는 한(漢)대의 비(碑)와 북위(北魏)시대의 비석이 있다. 진열된 비석을 살펴보면, 연공송비(兗公頌碑-曲阜知縣 張之宏 撰文, 包文該 書, 742년), 공안찬각석(孔顔贊刻石-唐睿宗 撰文, 723년), 대승사조상비(大乘寺造像碑-李士强 撰文, 744년), 문선왕묘문기비(文宣王廟門記碑-裵孝智 撰文, 773년), 을영비(乙瑛碑, 153년), 공경묘비(孔謙墓碑, 154년), 예기비(禮器碑, 156년), 공주비(孔宙碑, 164년), 사신비(史晨碑, 169년), 공표묘비(孔彪墓碑, 171년), 희평잔비(熹平殘碑, 1793년), 공포비(孔褒碑, 始立不詳, 1725년 출토), 도락잔한비(陶洛殘漢碑, 始立不詳, 1959년 출토), 가사군비(賈使君碑, 519년), 육조(六朝) 장맹룡비(張猛龍碑, 522년), 이중선수공자묘비(李仲璇修孔子廟碑, 541년), 칙건단본당기비(敕建端本堂記碑, 1350년) 외에도 많은 비석이 진열되어있다. 이곳의 탐사는 네 번째이다. ▶공묘에 담장을 두고 인접해 공부(孔府)가 있다. 유교(儒敎)가 중국의 통치이념 되면서 공자 후손들은 나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다. 그들은 따로 한 마을을 이루고 귀족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공부는 그들의 관저와 사저로 사용된 장소다. 그들이 썼던 옛 우물도 남아 있다. ▶공부(孔府)를 벗어나 조금 가면 공림(孔林)이 있다. 공림의 둘레는 7km이고 총면적은 200헥타르이다. 공림 중앙에는 공자의 묘가 있다. 묘(墓)의 비명(碑銘)은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전서체(篆書体)로 명대(明代) 1413년에 세웠는데 황양정(黃養正)의 글씨다. 그 비석 뒤에 작은 비석에 ‘선성묘(宣聖墓)’라 쓰인 것도 전서체이며 공자의 50대손인 공원(孔元)이 1244년에 세운 것이다. 공자묘의 동쪽에는 아들 공리(孔鯉-기원전532~482)의 묘가, 남쪽에는 중용(中庸)의 저자인 공자의 손자(孫子)인 자사(子思-기원전483~402) 공급(孔伋)의 묘가 있다. 공자묘 왼쪽에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시묘(侍墓)살이 한 3칸 건물이 있다. 공자묘 입구에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라고 쓴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의 ‘植’에 보면 한 획(劃)이 빠져 있다. 그 이유는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이 관리가 되어 외직에 근무하였는데, 그때 공자가 돌아가셨다. 공자의 장례식에 참석을 못했고, 뒤에 와서 6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며 공자 무덤 부근에 해(楷)나무를 심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그 나무는 죽고 밑동만 남게 되자 보호각을 짓고 그 앞에 ‘자공수식해(子貢手植楷)’ 비석을 세웠다. 공자의 제자 3,000여 명 중 자공(子貢)만 장례식에 참여 못하여 일부러 한 획을 뺐다는 것이다. 공자 탄신일 음력 8월 27일 전후로 이 비석에 물방울이 맺힌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자공의 눈물이라 부르고 눈물을 머금은 비석이라 뜻에서 함루비(含淚碑)란 별칭도 있다. 공림에는 공자의 묘 이외에도. 공자 후손들의 묘 수천 기도 산재해 있다. 세월의 무상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