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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존경하는, 전 종교 교육원 교수 길정권 형제님의 성찬식 말씀을 공유합니다. by 최명숙 자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God remembered Abraham)" 길정권, 2024년 6월 30일 (일), 서울 서 스테이크 부천와드, 성찬식 말씀 자료 창세기 19장 29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생각하사"라는 단어의 원문은 "remember, 기억하다"라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스펜서 더블유 킴볼 회장님은 후기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기억"이라는 단어라고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경전에서 언급되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인간의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계획하신 특별한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땅의 우르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경전에는 우상 숭배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2절,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특히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땅의 우르에서 우상숭배에 빠져, 그의 아들 아브라함을 우상의 제물로 바쳐 아브라함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 아브라함서 1장 30절) "이에 나를 거스려 결정하였던 악 곧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던 것을 회개하시더라. 아브라함서의 기록에 따르면, 우상 신의 제물로 바쳐 진 아브라함이 제단에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 짓으매, 여호와께서 주의 천사들을 내려 보내사, 우상으로 온 땅이 변질된 갈대아의 우르 땅에, 여호와께서 심한 기근으로 형벌을 내리시고, 아브라함과 그의 권속들은 기근을 피해, 메소포타미아의 하란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란 땅으로 이주하려 할 때에, 흥미로운 경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한 때는 자식의 목숨을 빼앗으려 한 아비를 데리고 가야할까요? 아니면 심한 기근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타지에 내버려두고 떠나야 할까요? 놀랍게도 경전에는, 아비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 또는 증오의 감정을 드러낸 구절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잠시 회개한 (아브라함서 1장 30절) 아비 데라를 데리고, 모든 권속들을 하나로 모아, 하란 땅으로 이주하여 기거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아비 데라의 우상 숭배로 인하여 초래되는 고통과 시련에 맞서, 더욱 믿음의 방향성, 즉 더욱더 믿음을 공고히 하여 여호와께 가까이 충실히 나아가고자 합니다. 하란 땅에서,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방향성, 변함없는 충실함을 견지하고 증거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거룩한 성약을 맺습니다. 즉 우리들에게는 "아브라함의 성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서 2장에서는, 구약의 기록보다는 더 상세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성약"은, "땅, 자손, 신권과 신권의 축복, 그리고 구원과 영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의 하나인, "땅" (가나안 땅) 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로 허락하시고자, 어쩌면 아브라함의 곤고함을 위로하시고 보상하시고자, 다시 하란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그럼, 다시 우상 숭배로 돌이킨 하란 땅에서도 일시적인 기근이 임하게 되어, 아브라함과 그의 권속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미 언급된 바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하란 땅에서도 다시 우상 숭배에 빠져들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이미 명하신 바, 그의 아비 데라를, 갈대아의 우르 땅에서 부터 연속적으로 우상 숭배로 다시 돌이킨 그 아비 데라를, 아브라함은 그의 아비 데라로 인하여 초래된 온갖 고난과 역경 등으로 인하여 간절한 바람과 오랜 기다림을 포기하고, 하란 땅에 그 늙은 아비를 남겨두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갔을까요? 신약전서에서, 아브라함이 축복을 남기거나 베푸는 유덕한 자로 분류되어져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별되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하였던 그의 믿음의 방향성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이었던 스데반의 설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 (가나안 땅) 으로 옮기셨느니라. "(사도행전 7장 4절) "그 아비가 죽으매. "아브라함은 그의 아비 데라를 혼자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아비 데라를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비 데라를 남겨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요약하여, 스데반의 기록대로 "그의 아비가 죽으매. "아마 아브라함은 노쇠한 그의 아비 데라를 마지막까지 봉양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그의 소망을 여호와께 의뢰하여, 전능자의 특별한 시험,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하나님이 주를 주로 섬기는 자를 영화롭게 하심의 증인으로 성별되어 집니다. 경전의 기록은, 아브라함은 그의 아비 데라를 하란 땅에서 장사 지내고, 그의 아비에 대한 소명을 다하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에 빠져 한 때는 자신의 목숨마저 빼앗으려 한 그의 아비 데라를, 심한 기근에서 여러 번 생명을 보존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우상 숭배로 돌이킨 그의 아비 데라를, 원망하거나 분노와 증오의 격한 감정을 드러낸 경전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련이 없이 크는 거목 (巨木) 은 없다"라는 말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환경이나 집안 출신, 조상들의 상속의 땅이나 금은 보화 등을 비교하여, 부모와 자신의 환경과 배경을 원망한 기록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오히려 혹 집안의 원수인 그의 아비와 그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시간과 재능을 허비하기 보다는, 하늘의 축복을 마냥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마땅히 하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이 그에게 오시기를 기다리는 자가 아니라, 그의 축복을 쟁취하기 위하여 그 스스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간절함과 기다림"으로 그의 축복들을 구하여, 그 축복을 남기거나 베푸는 유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별되어지기를 "간절함과 기다림"으로 간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상이 자손을 축복하듯이 아비가 자녀를 축복하여 복이 임하게 하거늘, 아브라함은 그 아비 데라를, 자녀가 아비를 축복을 받게 하여, 복이 있는 아비로 가장 나쁜 상황을 가장 좋은 상황으로 바꾸어, 오히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디. 이에 관하여, 아브라함은 그의 기록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셔서, 거룩한 "아브라함의 성약"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성별하사, 언급하신 약속된 축복들-"땅, 자손, 신권과 신권의 축복, 구원과 영생"을 끝까지 충실한 주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나쁜 상황을 가장 좋은 상황으로 바꾸는 힘이 "믿음의 힘이요, 곧 신앙의 힘", 믿음의 방향성과 근접성의 원리를 시련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단지 축복을 받는 자가 되기 보다는, 축복을 나누고 베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사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아낌없이 주의 사랑을 기꺼이 나누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약하여, 아브라함은 그의 권속들에게 축복을 남기거나 베푸는 자로 분류되어져, "믿음의 조상"으로 성별되어 졌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친절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외모로 판단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소망이나 생각, 또는 그 동기) 을 보시고, 때가 이르매,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 (잠언 16장 15절) 과 같은 은혜로, 우리를 속박에서 건져내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친히 인도하사,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여 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친절하신 분이십니다. 매우 가슴이 아픈 힘든 경험을 할 때도 있지만, 친절하신 주님께서는 상심한 우리의 마음을 좋은 기억으로 채워 주시며, 다른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때론 심각한 비극을 겪는다고 해서 우리의 생이 끝나는 것 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올라가야 할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 속에 잃어버린 것들로 인하여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가슴 아파하지 마십시오. 속임수와 고된 일상, 그리고 깨져 버린 꿈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힘을 내십시오. 힘을 내어, 다음 산을 오르기 시작하십시오. 전능자의 주문입니다. "환난의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편 15절) 미국의 시인 에드가 앨런 포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련이 없다는 것은 축복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Never to suffer would never to have been blessed.)" 너무 상심한 일들로 겹쳐져 절망에 빠져있을 때라도 힘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자녀들이나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이 그릇된 길을 간다고 할 때라도 신앙을 더욱더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혹 하늘의 긴 침묵이나 무응답으로 버림을 받아 혼자라고 외로움을 느낄 때라도 지금까지 견지해 온 충실함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영혼 깊숙한 곳에, 스며드는 작고 세미한 음성, 고요한 평강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 내가 너를 생각하사. 내가 너를 아노니. ".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니.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리니. "(여호수아 1장 5절) 주는 주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을 주가 사랑하심 (니파이전서 17장 40절) 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