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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론 유형 분석’에서 정리한 성령세례의 여섯 가지 유형은 역사 안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각자 전통의 장점들은 보유하고 타 전통이 지닌 장점들을 흡수하는 경향으로 발전되어간다. 서로 다른 성령론 사이의 갈등, 신학적 비평과 탐구 작업, 성령론의 자체 정화와 조화, 그리고 바람직한 성령론을 향한 발전 등의 과정을 거쳐가면서, 이러한 진전이 가능한 이유는 복음적 성령운동의 동인(動因)에 성령의 주권적 인도하심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역사적 진전의 뚜렷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주로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성격으로 대표되는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유형에서는 ‘정결과 능력’ 모티브의 보전과 함께, 점차적으로 성령의 은사에 대한 포용성이 눈에 띠게 나타난다. “이같은 은사운동은 전통적인 오순절 교단은 물론 웨슬리안-성결 그룹의 교회들 속에도 예외 없이 큰 영향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그리고 범교파적으로 거의 보편적인 현재의 상황이다. 그런데 은사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은사주의나 무분별한 은사 사용은 언제나 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되오온 것이므로, 이 점에 있어서 웨슬리안-성결 그룹을 포함한 복음주의 교회들은 분별력을 날카롭게 하여 은사 사용의 잣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웨슬리안-성결 그룹 내에서 방언 등 은사 문제로 인해 교단 분열이 잦았던 것과는 대조되는 현상이다. 은사 문제에 대해서는 미국 웨슬리안-성결 그룹뿐 아니라 한국 성결교회에서도 큰 진통을 겪었다. 한 예를 들면, 196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방언 문제에 대한 성결교신학교 교수단의 “방언에 대한 해명서”가 발표되었다. “우리 예수교성결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하신 말씀으로 믿으며, 또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체험적 신앙으로 고조하는 성결교파요, 방언파나 진동파나 입신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런가 하면 한영태가 말하기를, “기독론이 무시된 채 성령 체험이 강조되면 광신주의자나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크다. 성서적인 기독론 위에 성령론이 강조되어야 한다” 고 한 바와 같이, 현대의 웨슬리안 성결론은 성령에 대한 이해를 기독론과의 연관속에서 다루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에 중점을 둔 하나님 형상의 회복 또는 ‘그리스도 닮기’(Christlikeness)로서의 성결론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R. Larry. Shelton, "A Wesleyan/Holiness Agenda for the Twenty-First Century". Wesleyan Theological Journal (Fall, 1998) 33:2, 70; 그리고 박명수는 그동안 웨슬리안 성결론이 너무 죄론과 관련되어 발전해 왔다고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사실 부패성의 제거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라고 하였다. 성결을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으로 보는 것은 웨슬리 자신과 칼빈, 그리고 동방교회 서방교회를 포함하는 폭넓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동방 정교회의 전통에서 볼 때 성령께 대한 가장 큰 모독은 성령을 오늘날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과 제 1세기에 성령께서 하듯이 오늘날도 크리스천들을 신화(deify)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C. J. deCatanzaro(ed.), Symeon the New Theologian: The Discourses(New York: Paulist Press, 1980), 341-3. (2)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등의 세 유형은 개혁파 계통의 다양한 성령세례론을 나타낸다. 이 유형들은 개혁파 성령론의 강조점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의 보전과 함께, 전에는 받아들이지 못하던 방언이나 신유 등의 은사 사용이라든가 기사와 이적을 전도의 현장에 적용하는 일 등을 신학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앞으로 이같은 현상이 계속 짙어진다면, 결국 이 세가지 중에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대표하는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유형은 ‘중생=성령세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이라는 ‘제 3의 물결’과 유형 상 다를 바 없다는 흥미로운 분석이 나오게 된다.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나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제 3의 물결의 신학적 의미들을 보다 명쾌하게 규정지어줄 책들이 출판될 것으로 믿는데, 그것은 제 3의 물결이 역사적 정통주의의 계열에 서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제 3의 물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들은 19세기의 몇몇 가장 위대했던 복음주의자들의 잊혀져가는 글들을 연구함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그런가 하면 은사적 기독교에서 볼 때, 전통 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세례 받은 첫 증거가 방언이라고 보았지만, 은사갱신운동을 거쳐 ‘제 3의 물결’에 이르러서는 방언에 대한 강조가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중의 하나라고 보는 입장으로 변화되어왔다. 그래서 최근에는 전통 오순절주의자들도 이같은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반드시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보기보다는 여러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보는 경향이 짙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전에는 상대적으로 미약하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든가 ‘정결’ 모티브 등의 강조가 많이 보강(補强)되고 있다. 대표적인 전통 오순절주의자인 조용기는 1964년에 인격적 주님으로서의 성령의 존재에 대해 새로운 확신을 갖게 된 후, 그의 목회는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제 3의 물결’에서는, 실용적 효율성의 차원과 또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령세례라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용어보다는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제 3의 물결’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신학적으로 개혁주의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대다수라고 하는 점이 이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제 3의 물결’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보수적 복음주의자들로서, 그들 중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경험이 개혁신학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1987년 2월에 케빈 스프링거는 아나하임 포도원교회의 치유 세미나에 참석한 2041명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그의 목적은 ‘제 3의 물결’의 참여자들의 사회학적이며 신학적인 배경을 도출해 내기 위한 것이었다. 질문 중 하나로 케빈은 관련된 참가자들의 ‘성령의 (혹은 성령 안에서의) 세례’에 관한 이해를 물었다. 자신들을 복음주의자들이라고 밝힌 사람들 중 단지 2.24%에 해당하는 사람들(6명)만이 전통 오순절주의 정의에 동조했다. 45%(121명)는 그것이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에 뒤따르나 그것과는 구별된 경험으로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봉사와 증거를 위한 능력을 얻게 된다. 이 경험은 방언 말함을 동반할 수도, 안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많은 응답은, 49.06%가 그것은 ‘회심 때 일어나는 성령의 최초적 행동으로, 그것을 통해 한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다. 그 이후의 성령의 경험은 ‘충만’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필자는 서론에서, 앞으로는 성령론의 여러 전통들 사이의 장점들을 상호 교류, 보완한 통합성을 갖춘 ‘통전적(統傳的) 성령론’이 적용될 것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성령론의 역사적 진전에 따른 예상되는 변화를 조사해 볼 때, 이 모든 노선에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와 함께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의 강조가 모든 계통의 성령세례 유형에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현상에 대한 점진적인 강조가 현재 통전적 성령론이 나아갈 방향이라고 본다. 이 중에서 후자의 경향성에 대해서는 본 연구 제 V장 ‘전통 오순절주의로부터 제 3의 물결까지’의 내용을 통해 상술하였고,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가 강조되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령론 또는 기독교의 영성이 기독론과 분리되면 복음의 내용에서 멀어질 위험성이 크다는 학계의 지적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 오성춘은 말하기를, “기독교 영성의 핵심은 신자들의 경건한 성품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교제를 개발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하게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목창균도 복음적 영성의 정의에 대해서,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그의 삶을 닮아가는 삶” 이라고 확언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는 명백하게 하나님 형상의 구현으로서의 ‘그리스도 닮기’를 목표하고 있다는 점도 역시 주목할 점이다.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라; “의롭다함 받은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는 과정으로 들어가며 새창조와 새로운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게 됨을 바라게 된다.” Clark H. Pinnock, Flame of Love: A Theology of the Holy Spirit(Downers Grove, Illinois: Inter Varsity Press, 1996), 151; “예수 그리스도는 현재 내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축복만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본받고 성화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예수화하는 것이다. 예수는 머리요 우리는 그 지체이다. 우리 목적은 다만 예수 한 분 뿐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모티브와 은사를 동반한 복음 증거의 능력이 강조되는 통전적 성령론을 이끌어가고 있는 핵심은 무엇인가? 그 핵심을 파악하는 일은 곧 21세기 복음적 성령운동의 향방을 가름하는 일로서, 그것은 바로 ‘성령의 주되심’(Lordship of Holy Spirit)에 있다고 본다. ‘성령의 주되심’이란 “그리스도인의 삶과 복음 전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위격으로 각 신자 안에서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사역” . 이라고 필자는 정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