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서훈 논란’ 김원봉, 월북 이후 행적은? / KBS뉴스(News)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Если кнопки скачивания не
загрузились
НАЖМИТЕ ЗДЕСЬ или обновите страницу
Если возникают проблемы со скачиванием видео, пожалуйста напишите в поддержку по адресу внизу
страницы.
Спасибо за использование сервиса ClipSaver.ru
[앵커] 누구나 인정하는 독립운동가, 그럼에도 남과 북 모두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 약산 김원봉과 서훈의 문제, 더 짚어보겠습니다. 윤봄이 기자 나와 있습니다. 윤 기자, 앞서 잠깐 나왔지만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아무래도 영화 때문이죠. [기자] 네, 영화 ‘암살’이 개봉하면서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김원봉이 서훈이 안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것 역시 화제가 됐고요. 특히 당시 야당 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이 페이스북에 김원봉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의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다 이런 글을 올려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올해가 아무래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다 보니까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김원봉이 다시 주목을 받는 것 같습니다. [앵커] 독립운동의 공적으로만 보면 김원봉에게 훈장을 주는 건 너무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떤 기준으로 서훈 대상에서 제외된 거죠? [기자] 일단 보훈처가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를 하는데, 포상 대상자가 되려면 세 가지 기준이 있습니다. 화면을 한 번 보실까요? 먼저 적극적인 독립운동 공적이 있어야 하고요. 이 공적이 원전에서 확인되어야 하는 게 원칙이고, 또 사망 시까지 행적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보훈처가 김원봉을 정식으로 심사했던 건 2005년에 김원봉 동생이 신청했을 때 한 번인데, 월북 행적을 문제로 포상이 보류됐습니다. [앵커] 그런데 최근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도 훈장을 받지 않았습니까? [기자] 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냈던 이동휘도 공산당 활동을 했지만 건국훈장을 받았고요. 2005년도에는 잘 아시는 여운형도 건국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럼 무엇이 다른 것이냐. 보훈처 공식 설명은, 현재 해방 후의 사회주의 경력자들에게까지도 서훈을 개방했지만 북한 정권 수립에 관여한 사람까지 훈장을 주려면 아직은 국민적 공감대가 더 필요하다, 이런 입장입니다. [앵커] 사회주의 운동과는 별개로, 북한에 가서 공적 활동을 했으면 어렵다는 건데 그럼 왜 북한으로 간 겁니까, 김원봉은? [기자] 일단 기록으로 남은 것은 1948년에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 회의를 위해서 평양으로 갔다가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고 북에 남았습니다. 학계 해석은 당시 남쪽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요. [앵커] 신변의 위협이요? [기자] 네,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 무렵에 함께 활동했던 여운형 선생 등이 암살을 당하는 데, 이런 것들이 영향을 미쳤지 않았나 이런 분석이 있습니다. [앵커] 그 위협 말고도 이런 이야기도 봤습니다. 악질 친일 경찰에게 해방 후에 붙잡혀서 모욕을 당했다. [기자] 맞습니다. 김원봉의 동지라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회고에 나오는 내용인데요. 김원봉이 해방 후에 체포돼 당시 대표적인 친일파 경찰이었던 노덕술에게 모욕과 협박을 당했고, 친일파 출신 경찰들이 다시 득세하는 것을 보고 큰 좌절감을 느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앵커] 가장 지금 문제가 되는 게 북한에서의 행적이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북한의 건국에 기여를 했던 건지, 거기에 대해선 어떤 평가들, 사실이 뭔가요? [기자] 우선은 김원봉이 초기내각에서 장관급의 직책을 맡은 건 사실입니다. 제가 정리를 해봤는데, 먼저 김원봉이 국가검열상을 지내고요. 감사랑 감찰 기능을 하는 곳의 장이고요. 그 후에 노동상을 거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맡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 설명은 이 직책들이 모두 권력의 핵심까지는 아니라는 분석입니다. 마지막에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같은 경우에는 굉장히 상징적인 직책이라는 분석이고요. 그리고 특히, 김원봉이 북한의 조선노동당 고위당원이었다는 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앵커] 노동당원은 아니다? [기자] 네, 그건 한자까지 같은 다른 김원봉이 노동당원이었고요. 약산 김원봉은 노동당원이 아니었는데 북한 체제의 특성상 노동당원이 아니면 권력의 중심부로 가기는 어려운데, 김원봉은 노동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앵커] 노동당원이 아니어서 북한 권력의 핵심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25 때 훈장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기자] 훈장을 받은 건 맞습니다. 1952년에 노력훈장을 받았는데요. 그런데 이건 전쟁에서 군사적인 공로를 세워서 받은 건 아니고, 봄 파종 사업을 지도한 공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훈장을 받은 건 사실이고, 보기에 따라서는 북측 입장에서 후방에서 전쟁에 공을 세웠다,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앵커] 그런데 참 곡절이 많은 건, 결국 그렇게 됐는데 북한에서 숙청을 당했어요. [기자] 북으로 간 지 10년 만인 1958년에 숙청당한 것으로 추정이 되고 있고요. 그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앵커] 역사에 대한 평가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사회주의 계열도 예전엔 못 받다가 서훈을 받았고, 전문가들의 견해, 약산 김원봉에 대해서 어떤 입장들이십니까? [기자] 일단은 우리나라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했고, 또 광복군 부사령관까지 역임을 했기 때문에 이런 공로를 인정해서 대한민국 훈장을 줘야 한다 이런 주장이 있고요. 다만, 월북 후 행적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단 현재는 김원봉 한 명에게 서훈을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월북한 독립운동가를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앵커] 네, 조금 더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이는군요. 윤봄이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