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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역사수필 낭송 일본 천황은 한국인인가? 고분과 유물로 본 일본 천황의 실체 - 옥창열 역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가 쪽발이라고 사시해 온 일본은 대단한 나라였다. 그런 대단한 이웃을 둔 우리는 불행인가, 다행인가? 역사적으로 침략도 당하고 합병도 당한 앙금이 깊고 또 깊지만, 한편 오늘날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바로 옆에서 도움을 준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다. 애써 무시하고 외면만 할 게 아니라 그들을 알아야 그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러 해 독서와 현지답사를 했는데, 1억 2천만 일본인의 정신을 관통하는 정점에 천황이란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우리 중에 일부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천황이란 존재가 바로 우리의 조상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일본서기의 기술과 반론 일본서기는 신대기 편에서, 하늘나라 고천원에서 살던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가 남규슈의 가라쿠니다케 산에 강림하였고, 니니기의 4대손인 진무가 BC 660년 일향국에서 동쪽으로 정벌을 시작한 끝에, 나라의 카시하라에서 천황에 올랐다고 서술한다. 일향국은 규슈 중동부 미야자키현에 있던 나라인데, 그곳에 가면 300여 기에 달하는 크고 작은 사이토바루 고분군이 있다. 그런데 고고학자들의 발굴 조사 결과, 조성 시기가 AD 4세기 이후로 나타나 일본서기가 천황가 역사를 1천 년이나 뻥튀기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고분에서 가야계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와서, 당시 지배 세력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본 천황의 실체 규명 일본 내 고대 문명이 전파된 경로는, 대체로 한반도에서 규슈로, 다시 규슈에서 일본 중부 나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일부 소수는 한반도 동해안에서 일본 서부 시마네현으로, 여기서 다시 넓은 평야가 있는 교토 지역으로 진출하였고, 나중에 토착 조몬인들이 살던 동북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주몽을 따라 부여에서 탈출하여 고구려 건국에 힘을 보탰던 협보는, 2대 유리왕 때 대보 벼슬에 있으면서 왕에게 간언하다 일반관원으로 강등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무리와 함께 규슈 중부 구마모토 부근으로 이주하여 다파나국 시조가 되었다. 신라 4대 왕 석탈해가 다파나국 출신으로, 석탈해는 북방계 피를 받아 키가 매우 컸다고 한다. 일본 건국 신화에 나오는 스사노오는 대가야에서 신라를 거쳐 일본 서부 이즈모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규슈로 건너가 정착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규슈 중북부 야마대국의 여왕 히미코는 세 살 때 아버지와 일족을 따라 대가야에서 규슈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신라계 천일창 왕자, 연오랑과 세오녀 등 한반도 내 전란이나 정치적 격변이 있을 때마다 이주 물결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대 초기에는 신라에 밀린 가야계가, 후기에는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백제계 유민이 대거 이민했다. 이들이 열도 여기저기서 뒤섞이면서 힘을 겨루다가 그중 가장 힘센 자가 짱을 먹은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 대학 인류학자 고하마 모도쓰쿠 교수는 사람의 머리형을 연구하여 현대 일본인의 원류가 한반도인이라는 것을 증명했고, 동경대 자연인류학자 하니와라 카즈로 교수는 일본 국민의 75~90%가 한반도에서 왔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고대에 한반도인 다수가 건너가서 세운 동족의 나라가 일본인 것이다. 우선, 초대 천황은 대가야계로 보인다. 대가야의 터전인 경북 고령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도시라 일본 건국 신화 상의 고천원이란 말뜻과 어울린다. 대가야를 개국한 이진아시왕과 일본을 창조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신은 발음이 비슷하다. 니니기가 강림한 산을 가라쿠니다케, 즉 가야국산이라고 한 점, 고천과 고령의 일본어 발음이 다카마로 같고, 니니기가 처음 남규슈에 도착한 후 “여기가 가라를 보기에 좋은 곳이다”라고 하여 그곳 지명이 일향이 된 점, 산의 능선을 따라 조성되는 고분 형태가 일본 초기 고분과 가야의 고분이 같으며, 남규슈와 고령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철제 갑옷 등의 부장품들은 쌍둥이처럼 똑같고, 삼종신기도 양 지역에서 흔히 출토된다. 고구려/백제/신라/금관가야 왕족은 성이 있었는데, 대가야와 일본 천황가는 성이 없고 이름만 있는 것도 같다. 니니기가 이주한 후, 몇 대에 걸쳐 세력을 기른 끝에 4대손인 진무가 동정하여 나라 지역에서 야마토 정부를 세우고 초대 천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야마토 정부는 고령의 대가야를 임나가라로 불렀는데, 임나는 어머니 나라/주인의 나라라는 뜻으로 자신들의 모국을 지칭한 것 같다는 설이 있다. 한편, 일본 건국 신화에는,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열도에 내려보내기 전에 동생인 스사노오가 죄를 짓고 추방되어 신라 땅 소시모리에 머물다가 일본 서부 이즈모로 건너간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후손이 나라를 세우자 고천원을 다스리던 아마테라스가 나라를 양보하라고 했는데 잘 듣지 않아서, 손자인 니니기에게 삼종신기를 주며 열도로 내려가서 대대손손 잘 다스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삼종신기는 동경, 칼, 곡옥을 말하는데, 천황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런데 백제계 유민이 대거 열도로 이주하면서 중간에 백제계가 가야계를 밀어내고 천황 자리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 마한 연맹체를 주도하던 목지국의 지배가문 출신인 목라근자 장군을 시켜 가야 7국을 점령한 후 200년간 간접 통치했다. 이 무렵에 백제-왜 간 교류가 점차 활발해지고, 규슈와 나라 지역에는 백제 담로가 설치되었다. 4세기 고구려 광개토왕/장수왕의 백제 침공 때는 웅진 지역의 비류백제계 진 씨 세력과 개로왕 동생 곤지 같은 유력인사가 대거 열도로 이주했고, 7세기 백제 멸망 이후 20만 유민이 열도로 이주함에 따라 백제계 세력이 강대해지면서, 중간에 천황가가 백제계로 교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 김용운 박사는, 규슈 중부 구마모토현에 비류백제계가 분국인 구나국을 세운 후, 광개토왕의 백제 침공 시기에 웅진 지역에서 대거 이주한 본국 비류백제 세력과 연합하여 나라의 가야계 천황을 밀어내고 정권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백제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가 있었는데,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백잔은 온조의 한성백제이며, 이잔은 웅진에 있던 비류백제라고 한다. 비류백제계 구나국이 가야계 야마토를 둘러엎는 과정에서 가공의 신공왕후 신화가 등장하며, 신공왕후 아들 오진 천황 이름이 웅진에서 왔다고 한다. 미추홀에서 웅진으로 갔다가 열도로 간 비류백제계가 일본 천황을 먹었다는 주장은 재야사학자 최재석과 최진도 하고 있다. 다만, 백제 멸망 후 이들이 주도하여 역사서를 꾸미다 보니, 한반도와 단절하고 독자성과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려는 포석에서 쿠데타 사실을 감추고 천손 강림과 만세 일계라는 신화로 포장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한편, 김용운 박사는 백제 개로왕이 열도에 파견한 동생 곤지를 게이타이(계체) 천황이라고 추정한다. 일본 사서 기록에 게이타이의 태생이 분명치 않은데, 두 사람의 이름이 곤지와 오토로 둘 다 '큰 사람'이란 뜻이며, 나이도 거의 같고, 같은 시기에 같은 자리에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천황이 된 후, "백제와 왜는 똑같다"고 말하면서 친 백제노선을 분명히 하고, 즉위하자마자 백제를 위해 군사 5만을 징발하여 신라를 치려다가 반란으로 무산되는 등, 마치 백제왕처럼 행동했다는 것. 백제 왕가는 부여 또는 餘 씨/처가는 眞 씨이고, 일본 왕가는 원래 성이 없다고 하나 중국 사서에 餘 씨를 뜻하는 아마 씨/처가는 眞 씨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수상하다고 한다. 속일본기에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란 기록과 신찬성씨록에 '대원진인의 출신은 비다쓰(민달) 천황의 손자인 백제왕이다'라는 문구를 두고, 재야사학자 최재석은 "천황의 손자가 백제인이면 당연히 천황도 백제인이다"라고 해석한다. 다만, 교토대 역사학부 교수였던 우에다 마사아키는 "백제의 왕족과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천황가의 선조는 백제왕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라고 다소 애매한 언급을 한 바 있다. 전방후원분에 대한 문제 미야자키현의 사이토바루 고분군 중에는 가야 지역에서 보이지 않는 대규모 전방후원분이 섞여 있고, 이 무덤 양식이 나라 지역으로, 나중에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가 현재 수천 기가 남아있는데, 일본 측은 이를 근거로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남 영암 등 영산강 유역에 18기 남아있는 초기 형태의 전방후원분은 조성 연대가 일본 전방후원분보다 더 이른 것이며, 충남 공주 등지에서 쏟아져 나온 주구형 무덤이 전방후원분의 원형으로 보여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력이 일본 내에서 세력을 길러 천황과 지배 세력이 된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방계 예족 계열로 추정되는 영산강 세력이 신라와 백제에 밀려 도일 후, 더욱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함에 따라 전방후원분도 규모를 키우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묘제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맺으면서 한국은 임진왜란, 한일 합방 등으로 일본에 대한 원한이 있고, 일본은 백제 멸망으로 한반도에서 쫓겨간 원한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촌강 전투 패전 후에 열도로 가는 배를 탄 백제 유민들이 "언제 다시 곰나루에 있는 조상의 무덤을 찾을꼬. 원통하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실려있다. 한일 양 국민은 역지사지하여 미래를 위해 구원을 잊고 상생하는 관계가 되었으면 한다. 낭송 : 네이버 파파고 AI 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