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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변란사 #광해군 #인조 #인조반정 #능양군 #이귀 #신경진 #이서 #최명길 #중종반정 #김류 #박미 #이이첨 #김자점 #김개시 #인목왕후 #능창군 #정원대원군 #구굉 #구인후 인조반정(仁祖反正)은 조선의 4대 반정의 하나로, 1623년 4월 11일 서인 반정 세력이 광해군 및 대북파를 축출하고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 및 추대한 사건입니다. 계해년에 일어나 계해반정 또는 계해정사(癸亥靖社)라고도 하는데 주도자는 흔히 4대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와 최명길입니다. 핵심 인물들이 정2품 정도였던 중종반정과 비교하면, 인조반정은 그보다 낮은 종3품 관직자들이 주도했는데 인조반정의 4대장들이 현직이거나 직전에 지냈던 관직들은 모두 종3품 부사직이었습니다. 중종반정은 연산군의 동생인 진성대군이 반정이 일어난 것을 알지도 못했으나 신하들에게 추대되어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의 위세가 높아 중종의 본처인 신씨는 왕비 책봉도 되었고, 중종 본인이 조강지처임을 내세웠음에도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결국 폐위되었습니다. 반면 능양군은 모의 과정에서 김류의 집에 찾아가기도 하고 심기원이 군사를 모을 비용을 대고, 거사 일에는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광해군이 거처하던 창덕궁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도 처음에는 차기 군왕 복수 후보자 중 한 명이었을 뿐 신하들이 선택한 사람으로 반정 추진 과정에서 선조의 부마 박미는 능양군에 대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인조는 훗날 그를 포용하며 “이는 신하가 임금을 택한 때(臣擇君之時)의 일이니 내 어찌 개의할 것이냐.”고 하고 혜민서 제조로 등용했습니다. 또한 인조실록의 첫 번째 기사에서도 이서, 신경진이 김류와 함께 ‘추대의 계책’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즉위 교서에서도 신하들의 추대를 받은 것임을 밝혔습니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3일 계묘 1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 상이 의병을 일으켜 왕대비(王大妃)를 받들어 복위시킨 다음 대비의 명으로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폐위시켜 강화(江華)로 내쫓고 이이첨(李爾瞻) 등을 처형한 다음 전국에 대사령을 내렸다. 연산군 때 내각을 구성하던 신하들마저 연산군에게 등을 돌리고 반정파에 붙었으며 반정파도 이를 선선히 응낙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