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メッセージ: 金山徳牧師 説教題: 「 보험 vs 믿음 保険 vs 信仰 」 聖書朗読:사무엘상8:10~22 サムエル記上8章10-22節 (新共同訳) 代表祈祷:李盈周長老 聖書朗読:金賢貞執事 설교말씀 한국어번역문 사무엘상 8장10-22절 강해설교 김산덕목사 보험 vs 믿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은 사무엘을 찾아와서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것에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했고, 우왕좌왕하면서, 그들이 가장 먼저 저지른 행위가 바로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눈에 안보이면 불안한 것이 인간의 한계성입니다. 그런 백성들의 요구를 주님은 들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마음은 아주 섭섭하였습니다. 여하튼 믿었던 백성인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7절)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는 수 없이,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은 떼쓰는 못난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하셨습니다. 들어 주시기로 하시고서는, 주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의 제도”에 관하여 가르치시는 참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여기 “제도”라는 말씀에 주목하게 됩니다. 저자가 왜 이런 단어를 택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미쉬파트’라는 단어로 제도 관습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보다 일반적인 의미로는 ‘정의’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원하는 세상의 왕들의 제도, 왕들이 말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왕들이 생각하는 정의관이 무엇인지 내가 가르쳐 주마!라고 하시면서, 세상 권력자들이 생각하는 정의에 관하여 교육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이 11-17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결국 너희들은 너희가 세운 왕의 “종(노예)가 될 것이라.” 경고 합니다. 성경은 세상의 권력자 왕의 본심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입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는 자신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작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거친 표현이지만,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 말하지만, 다 자기 욕심과 권력 유지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한쪽은 정권 재창출, 다른 한쪽은 정권 교제: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들도 자신의 꿈과 비젼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냥 말하면서 성경을 가지고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자기의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둔갑한 것입니다.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설령 그것이 올바른 일이 아닐 지라도, 의롭다고 포장해버립니다. 이런 것이 바로 권력자가 생각하는 정의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세상 왕들의 바라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11에서 17절까지, 저자는 무려 6번이나 사용합니다. 그만큼 중요하고 강조한다는 뜻이죠. 한번 봅시다. 11/13절 ‘데려가다’, 14절 ‘가져다가’ 16절 ‘끌어다가’ 15/17절 ‘거두어’ 등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는 사실 한 단어, 라카흐(laqach)입니다. 이 단어를 문맥에 맞게 번역하다 보니까, 한글로는 데려가다 가져가다 끌어가다 거두어가다로 등장하지만, 같은 단어를 반복 강조한 것입니다. 이 라카흐는 ‘강제적으로 취하여 손에 넣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하는 것이 ‘왕의 제도’ 즉 왕이 생각하는 정의라는 뜻으로 아주 풍자적으로 애둘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왕들 권력자들은 항상 자신의 힘과 권력을 위해서 ‘라카흐’; 취하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로마 권력은 처음에 예수가 죄가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러자 민중들이 대거 항의하고 소란을 피우며 처형하라고 요구하니까, 하는 수 없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줍니다. 말하자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법을 아주 쉽게 무시합니다. 권력 유지의 기본은 인기, 포퓰리즘입니다. 민중이 원하면... 법을 초월해서라도, 금방 입장을 바꿉니다. 민중은 심리입니다. 법보다 심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엉큼한 정치꾼이지요. 민주주의를 최상의 정치형태라고 하지만, 최악의 공포정치가 될 수도 있는 잠재성을 가진 괴물입니다. 민주주의 가장 나쁜 예가 왕따 입니다. 결국, 18절에서 최종 경고장을 날립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날”이 언제입니까? 너희들이 세운 왕이 너희를 착취하여 너희가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리 부르짖더라고, 나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19절을 보시면, 이런 엄중한 경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래도 “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고 억측을 부립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우리 인간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성경을 찾아보면, 주님께서 이미 왕에 관하여 신명기 17장에서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들에게 경고하신 것입니다. 14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희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과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라.” 그리고 “병마를 많이 두는 왕을 세우지 마라” “병마를 얻으려고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라.” “아내를 많이 두어 마음이 미혹되는 왕을 세우지 말라.”“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는 왕을 세우지 말라.” 오늘 본문과 그 내용이 동일합니다. 특히 신명기가 말하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경고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희들이 앞으로, 애굽의 제국주의적 국가관, 성공주의적 가치관, 노예제도와 같은 사회구조나 세계관을 소유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세상이 말하는 왕의 제도가 바로 애굽적 방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와 자매들을 마치 연행하듯 데리고 가는 “라카흐” 행위는 노예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많이 징수하여 백성들은 헐벗고, 권력자들은 배가 부른 합법적 약탈을 일삼는 것이 제국주의적 발상입니다. 이런 것에 절대로 물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야훼 하나님은 그런 애굽 제국 방식의 노예 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구원받은 그들이 오히려 애굽 방식을 흉내내고 따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구원받기 이전의 방식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뜨면 코베어 간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아주 불안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방 블레셋의 해코지에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이 있었지만 이제 그도 나이들었고, 그의 두 아들은 아버지와 다르게, 돈만 밝히는 세속적인 종교인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신뢰할 만한 영적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나라처럼, 강한 리드쉽을 가진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그래도 싸움 잘하고, 잘 지켜줄 수 있는 모든 악당들을 물리칠 수 있는 헐리우드적인 영웅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삶을 기도로 달래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눈에 보이는 안심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놓고, 살아보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과도 같은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기보다는, 옳지 않은 줄 알면서도, 삶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서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가겠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안정과 보장을 위해서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을 때때로 세상 방식으로 조절하여 맞추어 가려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모습에 현대인 그리스도인들도 아마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그 정도는 괜찮아! 그러나 문제는 주님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 자신이 당신의 전적인 왕이 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떠 합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코로나의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였습니다. 택배 대리점장의 죽음은 무엇입니까? 이런 것들은 우리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권력자들은 분향소 설치조차 반대할 정도로 이기적입니다. 이 나라가 가진자들과 권력자들의 횡포로 가득차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성경이 지적하듯이, 왕들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 식구 챙기기에만 급급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 입장, 삶의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서,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시고 계십니까? 가되, 너무 멀리 가지 마십시오. 애굽으로 내려가는 삶의 방식, 삶의 안정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왕과 같은 보험만을 쫓다보면, 마음이 황폐하여지고 결국 기댈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때는 내가 돌아보지 않으리라! 그때는 주님조차 나의 지팡이가 되어 주시지 않겠답니다. 그러니 상처가 아물 수 있겠습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내 삶의 왕이 되고 싶어하시는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길을 걸어갑시다. 그곳에 생각지도 않았던, 꿈꾸지도 않았던 아름다운 기적의 열매들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보험보다도, 그분의 지배를 받는 신앙인으로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