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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칠천도 칠천량 해전의 아픈기억을 간직한곳 칠천도의 명품 트레킹길이 있다 칠천도 다리에서 물안까지 7.5 km의 트레킹길을 걸어본다 칠천량해전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 내용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칠천량 해전(漆川梁海戰) 또는 칠천 해전은 1597년(선조 30년) 8월 27일 (음력 7월 15일) 칠천도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이 전투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등이 전사한다. 1597년 8월 16일(음력 7월 4일)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1만여명에 달하는 조선수군을 총동원한 원균[6]은 부산 인근에서 바람과 파도를 고려하지 않고 적을 추격하다가 12척의 판옥선을 표류하게 해 잃어버리고, 9일에는 오히려 적의 반격을 받아 역시 많은 전선을 잃게 된다. 실록에서는 이 때 아군이 활 한 번 제대로 쏘지 못 한 채 패했다고 하면서 아군의 대응을 문제삼았고, 케이넨의 조선일일기에는 이 때 반격한 병력이 일본 수군이 아닌 육군 수송함대 병력인 것이 확인된다.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확보하기 위해 내리는데 이 때 적의 기습을 받았고, 원균은 400명의 아군을 버리고 도주한다. 1597년 2월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동했을 때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가자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해서 요시라가 직접 와서 포로들을 풀어주며 화친을 구걸했던 것과는 비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