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1) 孔子(공자 ) 一代記 (일생) : 인류문명사에 미친 (파란만장한) 삶 ; 家係圖 , 공자 탄생,어린 시절과 자수성가, 好學과 최초의 사설 교육(행단강학)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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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家苑 이윤숙 著 「論語 易解」 1,2,3권 주자는 사마천의 사기가운데 「孔子世家」를 인용하여 공자의 일생을 서술하고 있다. 공자의 선조는 본래 송나라의 귀족으로, 공자의 6대조인 공보가(孔父嘉)가 송화독(宋華督)에게 피살되자 4대조인 공방숙 대에 화를 피하여 노나라로 피신해왔다. 공방숙의 아들이 백하이고, 백하의 아들이 공자의 아버지인 공흘이다. 字가 숙량이라 흔히 숙량흘이라고 부른다. 숙량흘은 귀족집안의 후손이고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변변한 지위도 없었고, 부유하지도 못했다. 결혼하여 첫 아들을 두었으나 절름발이인지라 남들 앞에 떳떳이 내세울 수가 없자 나이 60이 넘어 안징재(顔徵在)를 재취로 맞아들였다. 훗날 사마천은 이를 야합(野合)이라고 비난하였지만, 이들 부부는 니구산(尼丘山)에 올라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정성껏 빌었다. 정성 덕분이었는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 만세사표(萬世師表)이자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게 되는 공자이다. 니구산에서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었기에 이름을 구(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이었기에 字를 중니(仲尼)라 하였다. 공자의 탄생년도에 대해서 춘추좌전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다만 애공 16년(기원전 479년) 여름 4월 기축일에 돌아가셨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두예(杜預:晉나라 사람.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춘추학의 정통적 위치로 올려놓은 춘추좌씨 경전집해 저자)는 공자가 노나라 양공 22년(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73세를 살았다고 하고, 춘추공양전(公羊傳)과 춘추곡량전(穀梁傳)은 모두 공자의 출생을 양공 21년 을유년(己酉年:기원전 552년)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공자의 생몰년대(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는 사마천의 사기 「孔子世家」에 의거하고 있다. ---------------------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추읍 창평 고을을 떠나 지금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공자의 고택이 있는 궐리(闕里)로 이사하였다. 공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린 시절에는 제기를 늘어놓고 제사지내는 놀이를 하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흔히 ‘俎豆禮容(조두예용)’의 시기라고 한다. 공자 나이 17세에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덤을 가르쳐주지 않은 채 돌아가시자 공자는 아버지의 장례 때 수레를 끈 사람을 통해 노나라 서울 동쪽의 방산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내어 어머니와 함께 합장하였다. 부모를 모두 잃고 가난과 주변의 멸시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공자는 20대초에 대부 계씨의 창고지기가 되었는데 저울질과 회계 관리를 공평하게 잘하여 여러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 뒤 나라의 종묘제사에 쓸 희생(犧牲) 가축을 기르는 일을 맡아서 잘 번성시킴에 따라 사람들의 공자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높아졌다. 참고로 세간에서 논어를 인용하여 공자가 창고지기와 가축 기르는 일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 논어 본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맹자(만장하편 제5장)와 주자의 논어집주서설의 위 문장을 근거로 나온 얘기이다. ----------------- 워낙 공부를 좋아한 공자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였고, 좋은 스승이 있다고 하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 배웠기에 공자 자신도 마침내 좋은 스승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수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당시의 교육제도는 ‘학문은 관부에 있다(學在官府)’고 하여 귀족 관료들이 교육을 독점하고 있었는데, 공자가 처음으로 민간 차원에서 강학(講學)을 시작하여 최초로 사학(私學)제도를 도입하여 공부의 기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공자의 ‘행단강학(杏亶講學)’이다. 공자가 집 뜰 안에 있는 은행나무 밑에 강단을 설치하여 강의를 시작한데서 나온 말이다. 공자가 34세에 노나라 군주의 허가 하에 제자인 남궁경숙과 함께 주(周)나라로 찾아가 당시 학식이 높다고 소문난 노자(老聃:노담)를 방문하여 禮를 묻게 된 것(問禮老聃)도 공자의 好學을 나타내주는 좋은 사례이다. 노자가 주하사(柱下史, 주나라의 도서실을 맡아보던 관리)로서 주나라의 예절과 절도를 잘 알고 있다고 알려졌기에 공자가 방문하여 예를 물었던 것이다. 여기서 도가(道家)쪽에서 노자가 공자보다 우위에 있음을 내세우는 의미가 담긴 ‘공자문례(孔子問禮)’라는 말이 나왔다. #공자일생 #공자일대기 #공자전기 #사마천 #공자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