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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의 #숭릉 과 story line 존재감이 작은 조선 왕중의 하나로 18대 현종을 말할 수 있습니다. 현종은 당당히 적장자로 왕위에 올랐으나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 속에 당쟁이 극렬한 시대에, #경신대기근 이라는 국가적 대 환란을 겪는 등으로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하였습니다. 예송논쟁과 경신대기근이 현종을 기억하는 키워드입니다 특기할 내용으로 현종은 조선의 왕중에 유일하게 #후궁을_두지않은_왕 이기도 합니다. 1641년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나 1659년 19살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1674년 재위 15년인 34세에 승하하였습니다. 슬하에 명성왕후 김씨 소생 숙종을 두었습니다. 명성왕후 김씨는 1651년(효종2) 10살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659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고종의 왕비 명성왕후(明成王后) 민씨와 한자가 다르다.) 현종이 죽은 후 9년 뒤에 창덕궁에서 죽어 현종의 곁에 묻혔다 현종의 릉은 동구릉에 있는 숭릉입니다. 숭릉은 조선 제18대 현종(顯宗)과 명성왕후(明聖王后) 의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숭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이 아니라 유일하게 팔작지붕을 갖추어서 매우 화려합니다.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어있다.) 또한 정자각에는 벽이 없는 익랑(翼廊)이 있습니다. (이런 익랑 양식을 가진 왕릉은 숭릉을 비롯하여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 휘릉, 경종의 의릉까지 4기가 있다.) 정자각은 정전 3칸, 배위청 2칸의 5칸 정자각이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나 숭릉 정자각은 규모가 확대된 8칸 건물이다. 왜 숭릉의 무인석은 눈을 감았을까. 신하들이 난리 치는 꼴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일까. (참고사항) 숭릉의 석물은 1659년 효종 영릉(寧陵)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효종의 영릉은 본래 동구릉에 있다가 1673년(현종14년)에 경기도 여주시로 옮겼다. 그리고 그전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모두 묻어 두었는데, 이듬해 현종의 숭릉을 조성하면서 효종 영릉의 석물을 꺼내 다시 사용하게 된다.) 예송논쟁은 1차 예송 (기해예송) 1659년(현종 원년), 효종이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제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은 계모가 아들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우며 충돌하였다. 남인의 3년상과, 서인의 1년상이 대립하였는데,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자의대비가 장자를 대상으로 하는 3년상의 상복을 입었기 때문에 서인의 1년상이 채택되었다. 2차 예송 (갑인예송) 1674년(현종 15년),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자 자의대비가 며느리의 상중에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두고 다시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기년복(1년복)으로 정했다가 대공복(9개월 복) 으로 수정하였는데, 남인이 대공복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기년복(1년복)을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은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남인의 기년복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현종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경신대기근이다. 경신 대기근(庚辛大飢饉)은 조선 현종 재위기간인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에 있었던 대기근이다. 한반도 역사상 전대미문의 흉작으로 대부분의 조선 인구가 기아 상태가 되어 추정 최대 100만명 (당시 인구의 7~8%)이 사망했으리라 전해지고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군주의 위엄과 지배질서를 확립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라 효종에게 엄청난 중압감과 두려움으로 건강을 위협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재위기간중의 업적으로는 농업의 발전을 위해 1662년 전주·익산 등지에 관개시설을 만들어 수리면적을 늘렸고, 대동법의 호남지역 확대 동성통혼 금지 상피법 등의 업적을 들 수 있습니다. 숭릉 연지(崇陵 蓮池) 숭릉 연지는 1674년(숙종 즉위)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으로 동구릉 내 9기의 왕릉 가운데 숭릉에만 연지를 두었는데 이는 동구릉 내를 흐르는 물길을 관리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현재 숭릉 연지의 면적은 4,941㎡이고, 평균 수심은 약 50cm 정도입니다. 이 연지는 처음 조성된 숙종 대부터 연꽃 종자를 기르게 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당시에 있었던 입. 출수구 등 제방(堤防) 시설이 없어지고 모양도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