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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고려시대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 삼층석탑) 1 год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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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고려시대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 삼층석탑)

원주 흥법사지 原州 興法寺址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原州 興法寺址 眞空大師塔碑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의 주인공인 진공대사 충담(忠湛, 869~940)은 신라 경명왕 때 활동했던 심희(審希)의 제자이다. 입당(入唐) 유학하고 918년(태조 원년)에 귀국하였는데, 이후 921년(태조 4) 고려 태조로부터 왕사(王師)에 임명되었다. 충담이 흥법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부임한 시점은 대략 922년(태조 5)에서 924년( 태조 7) 사이의 시기로 여겨진다. 그는 흥법사에 머물면서 원주 지역을 교화하는데 노력하였다. 충담은 940년(태조 23) 7월에 흥법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입적 직후 승탑이 바로 건립되었다. 그리고 탑비는 그다음 해인 941년(태조 24)에 조성되었다. 진공대사탑의 원래 위치는 흥법사지 뒤편의 산록이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사찰의 중심 조형물에 해당하는 석탑의 뒤편에 위치해 있다. 비신은 임진왜란 때 파손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탑비의 지대석은 방형이며 귀부와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다. 귀부는 다섯 개의 굵고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다. 선이 굵게 조각된 용두는 신체에 비해 다소 크게 만들어졌으며 벌리고 있는 입은 여의주를 물고 있다. 코에서는 서기가 뻗어 나와 귀 방향으로 흐른다. 용두의 머리 정상 부분에는 사각형의 홈이 파여져 있어 별도의 장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갑은 반원형에 가깝게 높이 솟았으며 팔각의 귀갑문에는 화문이 조식 되어 있다. 용두 양측의 귀갑문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다. 귀갑의 중앙부에는 비좌가 마련되어 있고 비좌의 측면과 정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이수의 하부에는 비신 홈이 있으며 비신 홈 주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이수의 평면과 정면은 방형의 형태이나 운룡문의 자유로운 묘사로 인해 굴곡이 많다. 이수에는 총 아홉 마리의 용이 율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수 중앙에는 제액을 만들고 ‘진공대사’라 음각하였다. 제액 주변은 깊이 있는 운문으로 조각하였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작성하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탑비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이 탑비는 일찍부터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태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인 937년(태조 20)부터 적극적으로 승려의 탑비를 건립하였다. 태조의 재위 기간에 비문이 작성되거나 탑비가 건립된 사례는 대략 11건이 확인되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최언위가 작성하였다. 하지만 진공대사탑비는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친제(親製)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신라 불교의 정통성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것을 태조가 보여주기 위해 진공대사탑비의 비문을 직접 작성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태조 왕건이 진공대사탑비를 친제한 이유는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의 조성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도를 갖고 있다. 태조는 936년 후삼국을 통일한 장소에 개태사를 창건하게 하고 940년 낙성법회 때 「개태사화엄법회소」를 직접 작성하였다. 태조가 개태사를 창건하고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을 세운 이유는 후백제 유민들에게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선포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태조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원의 신라 유민들에게 통일왕조 고려의 등장을 직접 선언하기 위해서 진공대사 탑비의 비문을 친제하고 역동성과 활력이 넘치는 진공대사탑비를 흥법사에 조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 왕건은 자신이 직접 비문을 작성한 탑비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명확하기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흥법사라는 교통의 요충지에 자신이 직접 작성한 탑비를 건립하였다. 흥법사는 강원도나 경상도 지역의 옛 신라 유민들이 육로를 통해 개경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되는 병목과 같은 교통의 요지이다. 특히 일반적인 탑비의 위치와 다르게 진공대사탑비가 사찰의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흥법사를 방문하는 모든 행인이 이 탑비를 볼 수 있게 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진공대사탑비는 진공대사 충담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한 비인 동시에 새로운 통일왕조 고려의 출범을 알리고자 하는 상징적 조형물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 原州 興法寺址 三層石塔 196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69m. 흥법사터에는 이전부터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1963년 지정)과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보물, 1968년 지정)의 귀부를 비롯하여, 높이 약 3m, 길이 약 60m 규모의 석축, 문터, 여러 주춧돌이 남아 있었다. 이 가운데 진공대사탑은 현재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여전히 절터에 자리하고 있다. 절터는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석탑은 밭 가운데에 서 있다. 석탑은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일반형 석탑이다. 바닥돌 위에는 하대석(下臺石)과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을 하나의 돌로 만든 4장의 널돌이 올려져 있다. 면석의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새기지 않고 대신 안상(眼象) 3구씩을 새겨 놓았는데, 안상 안에는 꽃 무늬가 오목새김되어 있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2장의 널돌로 구성된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너비가 좁은 편인데, 윗면의 경사가 심하여 특이하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 새겨진 얇은 1단의 굄은 간략화 과정을 보여준다.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널돌로 불규칙하게 구성되었는데, 규모는 매우 큰 편이지만, 너비가 좁은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새겨져 있다. 2장의 널돌로 덮은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평박(平薄)해 보인다. 밑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없고, 윗면에는 경사가 있으며,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3단의 각진 받침이 있다. 탑신부(塔身部)는 받침돌에 비해 크기가 급격히 작아져 좋은 비례라고는 할 수 없다. 곧 1층 몸돌의 너비는 반으로 줄었고, 높이도 약 2/3로 줄었으며, 2층 이상의 몸돌 높이는 1층 몸돌에 비해 2/3로 줄었기 때문이다. 각 층의 몸돌에는 가느다란 모서리 기둥만 조각되었을 뿐 다른 조각은 없다. 지붕돌은 추녀 부분이 많이 손상된 상태인데, 밑면 받침은 각 층마다 4단이고, 얕은 밑면 받침에 비해 윗면인 낙수면은 두꺼워 경사가 심하다. 추녀 밑은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의 반전(反轉)을 보인다. 각 지붕돌의 꼭대기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한 1단의 각진 굄이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심하게 손상된 노반만 있을 뿐이다. 이 석탑은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의 비례가 맞지 않고, 석재 구성이나 표면 조각도 기백을 잃고 약체화되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고려 초기 이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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