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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학기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원격 비대면 강의 가운데 '불교윤리학' 강의 영상 가운데 한 시리즈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강의영상을 녹화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했는데 , 불교와 윤리 관련하여 제가 발표했던 몇 편의 논문을 읽으면서 강의했습니다. 이 영상은 그 가운데 '공과 윤리'라는 제목의 논문에 대한 강의입니다. 1998년 고려대장경연구소에서 개최했던 '공과 연기의 현대적 조명'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논문입니다. 본 강의 관련한 논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1. 들어가는 말 - 空과 倫理는 갈등하는가? 불교인이건 비불교인이건, 空의 교설을 접하게 되는 경우 늘상 떠오르는 의문들이 있다. 일체가 空하여 善惡이 없다면 善을 행할 것도 없지 않은가? 세속이 곧 열반이라면 수행도 필요 없고 막행막식해도 되는 것 아닌가? 空에 대한 니시다니 게이지(西谷啓治)의 해석에 토대를 두고 민중불교의 이론적 근거를 懷疑하는 吉熙星의 다음과 같은 비판 역시 이러한 의문을 대변한다. 깨달은 禪師의 눈에 모든 色이 空으로 비친다면 윤회하는 경험세계를 어떤 부분은 惡으로 부정하고 어떤 부분은 善으로 선택할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此岸과 彼岸의 전적인 동일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무차별의 긍정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理想과 現實, 規範과 實在 사이의 긴장을 무너뜨림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를 비난할 초월적 기준을 상실케 하는 것이다. 만일 善이나 惡, 옳다거나 그르다는 분별을 모두 떠난 것이 불교의 空 사상이라면, 不義를 시정하기 위한 불교인들의 사회 참여는 분명 反佛敎的인 행위일 것이다. 또, 일반적인 불교 교설에서는 이 세상에는 인과응보의 이치가 엄연히 있다고 말한다. 모든 길흉화복은 과거에 지었던 업의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며, 지금의 일거수일투족은 우리의 미래나 내생의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善行은 三界 內에서의 향상의 삶을 보장하고 惡行은 삼계 내에서의 추락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空의 교설에서는, 그러한 업과 과보의 이론이 논리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中論≫ 第17 觀業品에서 龍樹(Nāgārjuna, 150~250 C.E.)는 업의 실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만일 業이 自性(실체)을 갖는 존재라고 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것은) 常住하리라. 또 業은 지어지지 않는 것이 되리라. 왜냐하면 常住하는 것은 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지어지지도 않은 業이 존재한다면 짓지도 않았는데 (과보를) 받는다는 두려움이 있게 되리라. 그리고 그 경우에는 梵行에 머물지 않는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煩惱들과 業들과 身體들 또 業의 主體들과 果報들도 신기루의 姿態를 띠고 있으며 아지랑이나 꿈과 같다. 이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매일매일의 불교 의식에서 독송되는 ≪般若心經≫에서조차 불교의 핵심 교설일 뿐만 아니라 윤리설도 내포하고 있는 '四聖諦'와 '十二緣起'의 교설에 대해서까지 부정적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것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空의 교설은 세속적 윤리와 무관한 것일까? 아니, 오히려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는 교설일까? 사실, 극히 일부에 국한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과거에 막행막식적 無碍行을 見性의 징표로 착각했던 수행인들이 터득했던 空은, 그들로 하여금 세속적 윤리를 부정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中論≫이나 ≪大智度論≫등의 논서를 보면 空에 대한 이런 식의 오해를 경계하는 구절들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空과 세속적 윤리가 갈등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龍樹가 邪見이라고 부르며 우려했던 관점으로, 후대 유식불교도들에 의해서도 철저하게 비판받았던 惡取空的 空見인 것이다. 龍樹는 이런 空見을 우려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空性이란 일체의 見解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勝者들에 의해 교시되었다. 그러나 空性의 見解를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佛敎 內外의 많은 사람들이 空의 의미에 대해 위와 같은 惡取空的 오해를 범하게 된 것일까? 논자는 본 논문을 통해, 空에 대한 그런 오해를 시정함과 아울러, 진정한 윤리란 오히려 철저한 空觀에 토대를 두어야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제2장을 통해 세속적 윤리의 근거를 공 사상 내에서 모색해 보았다. 위에 인용한 ≪中論≫의 게송에서 보듯이 인과응보의 이론과 공의 논리는 상충하는 듯이 보인다. 공 사상에서는 인과응보의 이치가 엄존하는 이유에 대해 도저히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일까? 논자는 제3장을 통해 공의 논리와 인과응보 사상의 구조적 동질성에 대해 논의함으로써 이에 대해 답해 보았다. 그리고 제4장에서는 제2장과 제3장에서 도출된 결론에 토대를 두고 공에 대한 다양한 이해의 수준에 따라, 각 개인의 윤리관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해 검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