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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며느리 작은 며느리 /이 옥자 나이가 팔십 줄에 들어서니 이가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한다 아침밥을 먹으려는데 씹을 수가 없도록 아파 치과에 갔다. 의사와 상담을 하니 이를 빼고 다시 해야 하는데 잇몸도 약해서 인공 뼈를 심고 임플란트를 하면 비용이 170만원이 든다고 한다. 나한테는 큰 액수의 돈이다. 작은며느리한테 전화를 해서 전후사정을 말했더니 뜻밖으로 선선하게 대답한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임플란트 하세요. 비용은 제가 내겠습니다”하는거였다. 며느리의 흔쾌한 대답에 놀랍기도 하면서 미안하기도 하고 말할 수 없이 고마웠다. 그렇다고 작은 애의 살림이 넉넉한 편은 아니다. 적은 월급으로 네 식구가 살아가는 빠듯한 살림인 줄 알면서도 전화를 할 수밖에 없는 내 마음도 편치는 않았다. 돈을 달라고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작은 며느리가 임플란트 비용을 준다는 말이 너무 고마워 참으려해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비용 때문에 한걱정 되었는데 작은며느리 시원한 대답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에 와서 큰며느리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큰며느리도 망설임없이 “네 알겠습니다 어머니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비는 당연히 제가 내야지요”하는 것이었다. 며느리 둘이 서로 병원비를 내겠다 하니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을까싶어 밤에 자려고 누웠는데도 잠이 오질 않아 뜬눈으로 밤을 세웠다. 큰아들은 직장에 다니다가 명예퇴직을 하여 사업을 한다고 빚을 졌다들었고 며느리의 수입으로 살림을 하는 형편임을 알고 있다. 큰아들 생각만 하면 살얼음판에 서 있는 것 같다. 부모로서 도와주지도 못하는데 170만원이란 돈은 큰 돈이 아닌가. 50년 전 작은 아이 낳을 때 친정집에 살면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서 출산을 했다. 친정집도 그 당시엔 가세가 기울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판으로 모든 재산이 없어지고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든때였다. 작은아들 출산 후 남편이 있는 회사로 전화를 했다. 출산한 둘째가 아들이라고 전하는 내게 남편의 한마디가 나를 쓰러지게 했다 전화기에 들려오는 남편의 냉정한 말 “내 자식이 아니니 난 모르오” 였다. 남편은 그 말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이를 낳자마자 쓰러져서 일어나질 못했다. 기억을 상실하여 아들의 생년월일과 시를 기억하지 못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방안이 전부 노랗게 보이고 순간 빙그르르 돌더니 앞이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밥이 입안에서 받질 않고 미역국도 어찌나 쓴지 입에 넣을 수가 없었다. 먹지 못한 날이 계속되자 가슴이 숨을 쉬려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살림을 하고 있었다고했다.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아픈 몸을 끌고 한약방엘 갔더니 큰 충격을 받았느냐 물었다. 대답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며 우는 나를 보던 한의사는 안되었던지 약을 지어주면서 우선 안정하라고 당부했다. 한 달 동안 일어나지도 못한 채 천장만 쳐다볼 뿐 삶에 의욕이 없었다.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었다. 세 살 된 큰아이를 두고 죽기엔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부모 없이 어린 것이 어찌 살까 생각하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 불끈 솟았다. 이른 악물고 악으로라도 살아야 한다고 오기로 일어났다. 어떤 고난이 와도 아이들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하자, 부모 없는 고아로 만들진 말자였다. 몸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간난아이를 업고 행상을 시작했다. 시골로 다니면서 보따리 장사를 하니 겨우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친정집에서 작은 아이 네 살 때까지 보따리 장사를 했지만 앞 날의 희망은 절벽이었기에 장사로 조금씩 모은 돈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방을 얻으려니 아이가 둘이라고 방을 쉽게 내어주질 않았다. 작은아들을 언니네로 보내고 큰아이만 데리고 방을 얻었다. 서울 달동네, 하월곡동 판자촌 전세 5만원짜리 방이었다. 바람부는 날엔 지붕이 날아갈까 밤을 새웠고 비 오는 날엔 방으로 빗물이 들어와 이불과 옷이 전부 젖었다. 수돗물은 한 동이에 10원을 주고 사먹었다. 1년 후 언니네 집으로 작은 아이를 데리러 갔다. 마당에서 놀던 아이는 나를 보더니 도망을 쳐서 숨었다. 그리움일까 노여움일까. 마음이 아팠다. 언니는 작은아들 때문에 많이 속상했다며 그간 있었던 일을 울면서 이야기 했다. 형부가 술이 잔뜩 취해서 작은아들이 밥을 많이 먹는다고 추운 겨울날 바깥으로 내어 쫓아 아이가 들어오지 않아서 동네를 세 바퀴 돌면서 찾지 못해 얼어죽지 않았을까 걱정되어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이 떨어지질 않았단다. 마당에 주저앉았는데 가을에 타작하고 쌓아놓은 짚단이 보여 혹시나하고 들춰보니 그 안에서 잠들어 있더라면서 지난 일을 하소연했다. 언니도 울고 나도 울었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밥을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형부가 원망스러웠다. 당일에 아이를 데리고 올 요량으로 새벽차를 탔기에 점심때가 되자 배가 고팠다. 언니는 따순 밥을 지어주었다. 밥을 보자 구박받았을 작은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이 나 밥을 뜨는둥 마는둥 아이 손을 잡고 언니네를 나섰다. 싸리문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오니 언덕 위에 큰 정자나무가 서 있다. 작은아들은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정자나무를 가르키면서 엄마가 언제나 데리려오려나 하고 정자나무 밑에서 엄마 오기를 매일 아침에 나와 해질때까지 기다렸다면서 날 올려다보았다. 언덕 위 정자나무 밑에서 내려다보면 멀리서 오고가는 버스가 보인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혹시 엄마일까 작은 아이가 쳐다봤을 아이가 안쓰러워 꼭 끌어안았다. 서울에 올라온 작은 아들은 혼자 집에 있어야 했다. 형은 학교에, 엄마는 먹고 살기 위해 일터에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에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뛰어나오던 아이가 그날은 기척이 없어 문을 열어보니 방바닥에 핏물이 얼룩져 얼굴엔 눈물과 피로 얼룩진채 잠들어 있었다. 아이를 붙잡고 울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아이를 깨워 병원엘 갔더니 의사가 아이 상처를 보자마자 큰 소리로 왜 이제 데려왔냐고 나무랐다. 찢어진 이마를 일곱 바늘 꿰맸다. 아이를 데리고 나오면서 다친 연유를 물었더니 엄마가 어디까지 왔을까 궁금해서 마중 나가던 길에 비탈길 가장자리로 걷다가 아래로 떨어져 울고 있는데 길 가던 아저씨가 꺼내주었다고 했다. 그 시절엔 아이 맡길 곳이 없어 아이는 혼자 놀면서 싸우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지만 일을 해야 하는 처지에서 혼자 둘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혼자 두고 일터로 나가던 내 가슴엔 늘 무거운 돌덩이가 눌러댔다. 가진 것 없이 혼자 두 아이를 키워내는 일은 등에 큰 짐을 진 것과 같았다. 너무 버겁고 무거워서 식당에서 일하다 과로로 쓰러져 일어날 수도 없는 지경이었지만 병원에 갈 돈도 없었다. 하루 품삯이 3천원이었는데 쌀 사고 연탄 사고 큰아이 학용품 사는데 늘 모자랐다. 저축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며칠 아파 일을 못했더니 큰아이가 굶고 학교에 갔다와서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가 신문배달을 하겠다고 나섰다.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배달하고 학교에 갔다. 아파 누워있는 내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연탄이 없어 방이 추웠다. 방이 너무 추우니까 아이들은 잠을 못 자고 눈만 떴다 감았다하다 겨우 잠이 들곤 했다. 몸은 여전히 아팠지만 아이들을 더 이상 굶길 수가 없어 아픈 몸을 끌고 일터로 나가 일당 3천원을 받으니 손이 바르르 떨렸다. 배고플 아이들 생각에 쌀 한 되, 연탄 두 장, 콩나물 백원어치를 사서 집을 향해 뛰어갔다. 배고플 아이들에게 빨리 밥 해먹이고 싶은 생각에 한달음에 집에 들어서는데 엄마 발자국 소릴 들은 작은 아이가 숨이 넘어갈 정도로 엄마를 부른다. 낮에 주인아주머니 심부를 했는데 천원을 주셨다는 거였다. 엄마 오면 쌀 사서 밥해먹으려고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했다. 돈이 도망갈까봐 손에 꼭 쥐고 주머니에 손 넣고 밖에 안 나가고 엄마 오기를 기다렸단다. 고사리 같은 손에 꼭꼭 접은 천원짜리 한 장은 아들의 온기가 그대로 묻어있었다. 아들한테 받은 천 원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샘솟게 했다. 세월이 흘러 큰아들은 학교 졸업 후 누구나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삼성에 취직했다. 작은아들은 형 덕분에 대학원까지 다닐 수 있었다. 잘 살아내 준 두 아들에게 와준 며느리들은 내게 보배다. 작은 며느리는 말하지 않아도 온갖 향기로운 차와 세탁에 필요한 것들이며 주방에서 소용 되어지는 것들을 채워놓아 너무나 편리하게 잘 지내고 있다. 큰 며느리는 계절에 맞춰 신발이며 옷이며 장만해준다.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때에 맞춰 척척 택배가 도착하면 감회가 넘친다. 작년 여름, 작은 며느리는 냉장고와 김치냉장고를 바꿔주었다. 나는 큰아들이 지어준 내 꿈속에 그렸던 집, 희망의 언덕 위에 하얀 집에 살면서 꽃을 가꾸고 잔디밭에 풀을 뽑으며 하루의 행복을 여닫는다. 오늘도 난 웃는다. 그리고 곱고 천사 같은 두 며느리들에게 항상 감사하다. 내 큰 며눌아가, 작은 며눌아가야 정말 고맙다. ㅡㅡㅡ 이옥자 약력 경기광주문인협회 회원 저서 : 언덕위의 하얀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