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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덕사의 대웅전 뒤편에 용이 살았다는 굴이 있어 굴암절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용덕사는 1792년(정조 16)에 편찬된 『용인군성륜산굴암용덕암창건기(龍仁郡聖輪山窟巖龍德菴創建記)』에 따르면, 신라 문성왕(文聖王) 때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초창하였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하면서 3층석탑과 철인(鐵人) 3위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현재 철인 3위 중 1위는 도난당하고 2위는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용주사 박물관에 있다. 1914년 5월에 기록된 『불량전답헌납기(佛糧田畓獻納記)』에 따르면, 1792년의 기록에 덧붙여 조선 중기에 석담선사(石潭禪師)가 중건하였고, 1825년(순조 25)과 1884년(고종 21)에 각각 승려 정사(淨舍)와 성월(聖月)이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용덕사의 경우 염거화상, 도선국사 이후의 변천 과정은 알 수 없고, 조선 중기에 석담선사가 사찰을 중창한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불량전답헌납기』에 따르면 이동읍 일대의 전답 가운데 대부분은 용덕사의 소유지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말기까지 상당한 사세를 떨쳤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찰의 창건주인 염거화상은 신라 말기의 인물이지만 사찰에 신라 말기의 유적이나 유물로 추정되는 것은 없다. 다만 미륵전에 모셔진 석조여래입상만이 시대적으로 좀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작품으로 추정될 뿐이다. 또한 도선국사가 지기(地氣)를 누르기 위해 3층석탑을 지었고, 철인을 만들었으며, 용덕사를 중수했다는 기록은 실제로 이곳에 3층석탑과 철인 2위가 남아 있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으나, 이 탑과 조형물이 도선국사가 생존했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후대에 도선국사의 도참설(圖讖設)과 비기설(秘記設)을 적용하여 중건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조선 중기에 용덕사를 중수한 승려 석담은 포곡면에 있는 백련암을 중수한 이와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측된다. 두 절은 지리적으로 가깝기도 하고, 백련암에 전하는 『백련암약사』를 지은 이가 석담이기 때문이다. 또 근처 절 가운데 유독 이 두 절에서만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어 두 사찰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용덕사 [龍德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