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소년 유격대 1951년 4월 개성 탈환전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Если кнопки скачивания не
загрузились
НАЖМИТЕ ЗДЕСЬ или обновите страницу
Если возникают проблемы со скачиванием видео, пожалуйста напишите в поддержку по адресу внизу
страницы.
Спасибо за использование сервиса ClipSaver.ru
한국군 지휘부는 한국전쟁 초기 국군이 후퇴할 때 북한군에 대한 견제로 적 후방 깊숙이 유격대를 투입하는 전략을 구상했다. 작전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미군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태백산에 들어가 유격전을 하면서라도 싸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전의를 보였다. 그리하여 전쟁 초기 편성된 유격대는 적진 후방 깊숙히 침투하여 북한군을 견제하는데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1951년 초 공산 게릴라들이 다시 준동하면서 아군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하자 국군과 유엔군도 유격대를 본격적으로 조직하여 적 후방에 투입한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의 참전 이후 보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형태의 유격대를 편성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육군 본부는 을지1병단에 이어 강화도에서 서해안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자생유격대 조직과 청년들을 규합하여 을지 제2병단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을지 2병단은 창설된 다음날 백령도에서 창설되어 활동 중인 미8군 표범 부대(레오파드 부대)의 작전통제를 받게 되었다. 이때 제2병단은 차동준 소령의 지휘 하에 제21, 제22, 제23, 제24, 제26, 특별연대로 편성되었다. 병단은 기초훈련을 마친 다음 연백군 및 개풍군 일대를 작전지역으로 선정하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공산군은 마침내 병단의 대규모 후방 교란을 우려하여 전방에 배치된 2개 전투 사단을 황해도 해안지역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육군은 미8군과 유격대의 지휘통제와 군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을지병단을 미8군에게 인계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을제1병단은 커클랜드 기지로 흡수되었으며, 서해안의 을지2병단도 옹진반도 동남부 지역의 작전을 통제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창설된 울프팩 기지 예하로 전환되었다. 그밖에도 같은 시기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직속의 제5816부대를 강화도에서 잠정 편성하여 운영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한강 북쪽의 개성까지 정찰 및 기습작전을 펼쳐 많은 공을 세운다. 개성유격대=공식 명칭은 ‘강화유격대 6·25 전쟁이 터진 뒤 국군의 주력은 내륙 지역에서 적에 맞섰으나 민간인들로 급히 구성한 유격대는 동·서해안 주변 지역에서 활동했다. 군 편제에 정식으로 포함되지 않은 부대였으나 곳곳에서 활동하며 적의 후방을 교란했다. 강화유격대는 전체 규모 300명 정도였다. 중공군이 1951년 4월 이후 춘계 공세를 강화할 때 이 유격대는 강화도에서 개성과 개풍을 오가며 후방 부대를 공격함으로써 서울 인근 송추까지 접근한 중공군 전선부대의 힘을 약화하는 데 공헌했다. 영상을 보시면 알겠지만 청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는 하나 대부분 소년병으로 보인다. 2010년 3월 3일 중앙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16세의 나이로 개성 유격대에 참전한 박광현님의 수기 내용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나는 아식보총(A式步銃=모신나강)을 들었다. 총신이 긴 러시아제 소총이다. 그때 내 나이 16세.입대 뒤 첫 출전(出戰)을 위해 우리는 강화도 동북쪽인 월곶에 모였다. 이어서 개풍군으로 침투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개성 쪽 흥교면의 조랑촌에 먼저 상륙했다. 그곳에 야영하면서 보초를 서다가 저 멀리 담뱃불이 다가오는 것을 봤다. 계속 그를 주시하던 나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그만 사격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반딧불이였다. 적지(敵地)에서 실수로 총성을 내 아군의 위치를 노출시킨 끔찍한 실수였다. 곧바로 중공군이 공격을 가해 왔다. 나는 이를 피해 바다에 떠 있는 배 위로 돌아가다가 마침 불어나고 있던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 갔으나 요행으로 살아났다. 교전 중에 옆의 동료가 죽어 넘어지는 것도 목격했다. 숨진 그를 끝까지 끌고 내려와 큰 실수 뒤 처음 상사와 부대원들로부터 격려를 받기도 했다. 1950년 6월 25일 민족적 비극이 시작되면서 내 고향 개성(開城)은 곧바로 북한군의 군화에 짓밟혔다. 그해 말이 되자 이번에는 수많은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51년 3월 초 서울이 중공군 치하에서 벗어났고, 중공군은 북으로 쫓겨갔다. 그러나 4월 22일 다시 중공군이 내려오면서 나는 개성을 떠나야 했다. 어머니가 우시면서 노자를 건넬 때 뭔가 불안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귀향한다는 믿음으로 문을 나섰다. 먼저 인천으로 갔다가 다시 강화도로 떠났다. 그곳에는 개성을 하루빨리 수복하려는 고향 사람이 많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5월 1일 미 8군 직속 국군 5816부대에서 민간인으로 ‘편의대(便衣隊)’를 모집한다고 해서 자원했다. 그렇게 해서 내 손에 쥐여진 것이 아식보총이다. 그 총은 길어서 메고 다닐 때 가끔 땅에 끌렸다. 소총과 함께 방망이 수류탄, 그리고 미군이 준 MK2 세열수류탄을 받았다. 우리 부대원은 모두가 개성 또는 인접 개풍(開豊) 출신이었다. 하루 동안 무기 다루는 법과 유격전 교육을 받았다.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며 다가오는 중공군의 대부대와 맞붙었을 때 마음껏 사격을 했다. 그러나 아식보총은 단발식이었다. 총신이 과열되면서 총탄이 잘나가지 않았다. 총신에서는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계속된 사격으로 총이 뜨거워진 것이다. 나는 누군가 알려준 대로 급히 총신에 소변을 보았다. 5월 22일 드디어 우리는 고향인 개성에 들어섰다. 오후 4시쯤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집이 저 멀리 보였다. 대문을 열고 문을 들어서니 어머니는 눈물부터 흘리셨다. 어깨가 구부정하셨던 아버지는 애써 놀라지 않은 척 하시면서 반갑게 격려해 주셨다. 한창 딸기 철이었다. 전쟁 중에 어디서 장만하셨는지 딸기를 가지고 오셨다. 귀하던 설탕까지 얹어서 주셨다. 유격대 활동 등을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흡족해하시고, 어머니는 옆에서 그저 눈물만 흘리셨다. 한 시간 정도 앉았다가 집을 떠났다. 그것이 부모님과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집 대문 안쪽에 서 계셨던 부모님. 내가 본 아버님과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부닥치면서 우리는 5월 23일 고향 개성의 모습을 멀리 바라보면서 후퇴했다. 그리고 강화로 밀려 내려온 뒤 그리운 고향 땅을 다시는 밟을 수 없었다. 아버님은 53년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89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지를 통해 부모님의 소식을 들었다. 어머님은 나중에 고향을 떠나게 되셨단다. 개성은 대한민국과 인접해 있어 ‘성분’ 좋은 사람만 살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향을 떠나시면서 어머니는 “막내 광현이가 올 텐데, 집을 어떻게 비우느냐…”고 절규하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