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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훈.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을 기록] 지하 700미터, 인간의 언어보다 먼저 짙은 어둠이 도착하는 그곳에서 카메라의 셔터가 울린다. 전제훈은 사진을 찍기 위해 탄광으로 간 것이 아니다. 그는 삶으로 들어갔고, 노동을 선택했고, 카메라는 그 다음에 들어왔다. 대학 졸업 후 탄광에 입사해 광부가 되었고, 40년을 지하에서 일한 뒤 정년퇴임 후 다시 탄광으로 돌아간 그는 ‘기록자’이기 이전에 끝까지 남은 노동자였다. 그의 사진이 ‘리얼’한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동일한 생의 조건에서 나온 눈이기 때문이다. 전제훈의 사진은 현장을 ‘대상화’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소비하는 시선이 아니라, 같은 깊이에서 나온 동일한 호흡의 기록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사진은 다큐멘터리를 넘어 존재론적 증언으로 이동한다. 1.노동은 흔적이 아니라 ‘존재의 형상’이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운 광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정면을 응시한다. 헬멧, 마스크, 방진 장비, 땀과 석탄가루로 덮인 피부. 그 얼굴들은 특정 인물을 넘어서 ‘노동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원형적 형상이 된다. 각각의 인물은 개별적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집단적 존재로 겹쳐진다. 여기서 전제훈의 사진은 발터 벤야민이 말한 ‘역사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진보의 표면 아래에 가려진 패배자들의 시간, 승자가 아니라 지속한 자들의 역사. 이 사진들 속 인물은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문명이 가장 쉽게 잊으려는 자리를 끝까지 견딘 존재들이다. 전제훈은 그 얼굴들을 통해 산업화의 그늘, 에너지 문명의 가장 낮은 토대를 정면으로 호출한다. 2.2027년, 사라지는 것은 탄광이 아니라 ‘한 시대의 신체’ 2027년이면 탄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폐광은 단순한 산업 구조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신체가 사라지는 사건이다. 탄광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에너지 생산 방식의 변동이 아니라, 땅의 깊이와 인간의 육체가 맞닿던 방식 전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전제훈의 사진은 바로 이 ‘소멸 직전의 시간’을 기록한다. 그의 사진 속 갱도는 더 이상 산업 시설이 아니라, 하이데거가 말한 ‘결정적 거주 공간’, 즉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세계 속에 새기던 장소로 변모한다. 레일, 갱도, 조명, 굽은 철제 구조물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노동의 시간들이 층층이 쌓인 존재의 구조로 읽힌다. 3.전제훈의 사진은 ‘노동하는 실존’의 초상 전제훈의 사진은 사회고발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빈곤이나 위험을 외부적 메시지로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사르트르가 말한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의 실천에 가깝다. 인간은 선택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전제훈은 그 조건을 외부에서 관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해 내부에서 살아냈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고발’이 아니라 ‘증언’이 된다. 광부들의 얼굴은 불쌍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다. 팔을 교차한 자세, 정면을 바라보는 눈빛, 마스크를 쓴 채 흔들리지 않는 응시. 그것은 위험을 감수한 생존의 윤리이며, 노동이 곧 존재가 되는 순간의 형상화다. 4.기록은 중립이 아니다. ‘윤리적 선택’ 사진은 흔히 객관적 매체라 불리지만, 전제훈의 사진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선택의 결과다. 그는 안전한 거리에서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갱도 안, 같은 공기, 같은 위험, 같은 숨으로 찍는다. 이때 카메라는 폭력적 장치가 아니라 연대의 도구가 된다. 그의 작업은 미셸 푸코가 말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권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에너지를 소비하는 사회는 그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다. 전제훈은 바로 그 지워진 얼굴을 다시 가시화하는 사진가다. 그의 카메라는 감시가 아니라 복권(復權)이다. 5.가장 리얼한 사진작가인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삶의 동일성’ 전제훈이 ‘가장 리얼한 사진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선명도나 콘트라스트, 다이나믹 레인지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생의 위치에서 나온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는 광부를 찍은 사진작가가 아니라, 광부가 찍은 사진에 가깝다. 이 사진들에는 연출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보다 더 완성도 높은 ‘구성’도 없다. 왜냐하면 구성한 것은 사진이 아니라 40년의 노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단일한 작품이 아니라, 시간이 응축된 신체의 아카이브다. 전제훈의 사진은 예술이기 전에 ‘역사의 마지막 증언’이다, 전제훈의 탄광 사진은 단순한 산업 기록도, 노동 미학도 아니다. 그것은 사라질 세계의 마지막 초상이며, 에너지 문명 뒤편에 숨겨진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