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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계비(繼妃)가 된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신씨의 딸이며, 신숙주의 외조카였다 아버지 윤기견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윤기견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자 어린 윤씨가 길쌈을 해서 어머니 신씨를 봉양했다고 한다 윤씨는 성종보다 2살 연상으로 어릴 때 간택 후궁으로 1473년(성종 4년) 입궐하여,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大妃) 즉 정희왕후(貞熹王后) 안순왕후(安順王后) 소혜왕후(昭惠王后)가 있었는데 윤씨는 이들 또한 극진하게 봉양하여 신뢰를 얻었다 3년 뒤인 1476년(성종7년) 첫 부인인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했다 윤씨는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성종母) 한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7일 윤씨는 원자(元子) 이융(후에 연산군)을 낳으면서 왕비로서의 지위가 확고부동해지는 듯 했지만, 여색(女色)을 탐하는 성(性)종이 그녀에만 만족할 리가 없었다 중전 윤씨가 아들을 낳고 몸을 추스르며 육아에 집중하는 동안 성종은 아름다운 소용 정씨와 엄씨의 처소를 들락거리며 후궁들을 총애하면서 산후우울증(?)과 함께 윤씨의 투기가 점점 심해져 성종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윤씨의 집안이 크게 내세울 만한 명문가가 아니다 보니 집안이 좋은 후궁들은 은근히 왕비를 무시하며 그 자리를 위협했다 본성이 괄괄한 성격이었던 윤씨는 그런 왕과 후궁들의 태도를 참지 못하고 성종과 종종 다투었다 두 후궁은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자신들도 윤씨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꿈을 꾸면서 윤씨를 총애하고 있던 인수대비에게 접근하여 윤씨를 고자질했다. 인수대비는 원자를 낳은 윤씨를 이뻐했었지만, 두 사람의 이간질로 점차 윤씨를 탐탁치않게 여기게 되었다. 윤씨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으로서 내명부를 다스렸지만, 돌아서버린 남편의 사랑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심하던 그녀는 자신의 연적(戀敵)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 신씨의 도움을 받아 정씨와 엄씨의 처소에 시신의 뼈를 묻어두어 죽게 만드는 매흉(埋兇:주술의 일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매흉이 아무런 효과가 없자 후궁 정씨와 엄씨가 짜고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만들어 숙의 권씨의 처소에 던져 넣어 일부러 공개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궁중이 발칵 뒤집히자 성종은 내명부에 봉작된 23명의 후궁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문초했지만 범인을 색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용 정씨소행으로 결론 났으나, 중전 윤씨의 처소에서 주술 방법이 적혀있는 방양서(方禳書)와 극독(劇毒:지독한 독)인 비상(砒霜)이 발견되었고, 투서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도 발견되면서 결국 윤씨의 소행이 드러났다. 비로소 진상(眞相)을 모두 알게 된 성종은 분노하였고,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하려 했지만 대신들이 앞 다투어 말렸다. 그녀가 원자(元子)의 생모(生母)였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불문에 붙였지만 주술을 도와준 어머니 신씨의 직첩을 회수하고 궁궐 출입을 금했다. 그리고, 흉물을 궐내로 반입한 중궁전 나인 삼월이는 교수형에 처했으며, 나인 사비는 장형 100대를 때리고 변방(邊方)의 관비(官婢)로 내쫓았다. 가까스로 처벌을 면한 중전 윤씨는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은 은인자중(隱忍自重:참고 견디며 몸조심하다)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종의 여성편력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여러 후궁처소를 들락거리며 중전 윤씨 마음을 아프게 했고 성종에 대한 원망이 가슴 속에 쌓여만 갔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고 성종의 사랑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종이 후궁의 처소에 들었다는 것을 듣고 후궁의 처소까지 난입하여 패악을 부리던 윤씨는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야 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분노한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즉시 그녀를 폐서인(廢庶人)하라고 요구했다. ‘내훈(內訓:훈계)’이라는 책을 써서 내명부를 교육시킬 정도로 여성의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어머니였다. 이미 윤씨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성종은 못이기는 척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때는 삼촌인 신숙주도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윤씨는 대비들은 물론 성종의 후궁들과도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이윽고 성종이 조정에서 폐비 문제를 거론하자, 대신들은 윤씨가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성종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성종의 결심이 굳건함을 알게 된 대신들은 만일 폐비하더라도 윤씨는 세자의 생모이므로 별궁에 안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종은 대비의 뜻이라며 그녀를 친정어머니 신씨와 살도록 명했다 1479년(성종 10년) 6월, 마침내 중전 윤씨는 직첩을 빼앗기고 폐서인(廢庶人) 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다. 원자(연산군)의 나이 4살이었다. 왕비를 폐출시킨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해 윤 10월 날씨가 차가워지고 윤씨의 거처에 도둑까지 들자, 폐비를 별궁으로 들여야 한다는 중신들의 의견이 비등했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왕비는 폐출되고 왕자 융은 외가인 강희맹의 집에 거처하면서 양육되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자신의 부인이요, 후일 왕위에 오를 원자의 어머니라 성종 역시 그녀가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성종은 윤씨가 폐위된 후에도 언문(諺文)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며 허물을 고치기를 바랬다. 그러나 성종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1482년(성종13년) 정월, 연산군이 일곱 살이 되자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 논의가 일어났다. 또한,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해 세자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고, 신료들은 자연스럽게 폐비 윤씨를 복권(復權)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폐비를 미워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정희왕후 소혜왕후는 여전히 폐비를 혐오했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더욱 모함하였다.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쳐 그녀의 복권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해 여름, 나라에 기근이 들고 세간의 물가가 오르자, 중신들은 폐비 윤씨가 알아서 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별궁 한지를 권했다 그러자 성종은 내관 안중경을 윤씨의 사가로 보내 그녀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그때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 윤씨에게서 반성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한편으로 정희왕후도 성종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문서한을 보내 결단을 독촉했다. 『과거 윤씨가 독을 가지고 첩을 살해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원자를 끼고 ‘내 명이 장수하면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협박했다. 또 주상에게 ‘눈을 도려내리라’ ‘흔적을 없애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등 험한 말을 했고, 주상이 편치 않을 때 즐거워하는 등 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이런 대비마마의 압력과 일부 조정 대신들의 폐비 사사(賜死) 여론이 일어났지만, 성종은 원자(元子)의 생모임을 들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연산군의 세자책봉이 거론되면서 성종은 훗날 폐비 윤씨로 인한 문제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였다. 성종은 곧이어 삼정승과 6조의 판서 및 대간(臺諫)들을 불러 폐비윤씨의 처분에 대해 논하였고, 결국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왕명을 봉행한 사람은 좌승지 이세좌와 이극균이었다. 이에 따라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 16일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윤씨의 나이 28살 이었고, 세자 융의 나이는 7살 때였다. 이것이 갑자사화의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 연산군이 폭정으로 치달아 폐위되는 비극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윤씨는 처음에 경기도 장단에 매장되었으나 장지가 좋지 않다는 지관의 지적으로 성종은 1488년(성종19년)경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의료원 자리로 이장을 하였고, 묘비명도 없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세자의 앞날을 염려한 성종은 ‘윤씨지묘(尹氏之墓)’라는 묘비명을 쓰게 하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은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1495년(연산군1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이 사건을 알게 되었고, 그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숙의·정소용을 궁중 뜰에서 살해하고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 항과 봉안군 봉도 귀양 보낸 후 죽였다. 성종의 “폐비의 추숭을 허하지 말라.”는 유교(遺敎)도 무시되었다. 1504년 3월 25일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憲王后)’로 추존되었으며, 묘호(廟號)도 회릉이라고 했다. #조선역사 #역사유튜브 #폐비윤씨 [조선역사]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연산군의 어머니) [역사다큐, 수면다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