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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재(朴春載, 1883년~1950년) 박춘재는 우리 전통연희사에 있어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전통극과 근대극을 잇는 교량적 역할', '경기 명창으로서 가객의 계통을 이은 인물', '우희와 굿놀이에서 18-19세기 시정의 재담 연행으로 이어지는 전통과 1930년대 만담류의 재담극을 이어준 인물', '이전 시기 궁정배우의 전통을 이은 인물', '발탈의 시조' 등의 평가는 박춘재의 위상을 말해준다. 1883년 지금의 서울 독립문 근처에서 태어난 박춘재는 '조선 제일류 가객', '조선 명창', '대명창', '구파극의 중심', '우리나라 만담의 시조', '가무별감 중에 일등' 등의 찬사를 받았다. 그런데 이러한 찬사가 괜한 말이 아니었음은 당시의 수많은 신문 기사와 전통예술 원로들의 증언을 통해서 입증된다. 1915년 유일서관(惟一書館)에서 나온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는 박춘재의 이름을 내걸고 홍보했다. 이 잡가집의 끝에는 박춘재의 사진을 싣고 '조선제일류가객박춘재(朝鮮第一流歌客朴春載)'라 설명을 하고 있을 정도이다. 다재다능한 연희자로서의 박춘재는 특히 잡가, 재담, 〈발탈〉에 능했다. 대략 1900년을 전후해서 시작된 박춘재의 〈발탈〉은, 그 자신의 재능과 발을 이용하는 독특한 연행 방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듯하다. 박춘재는 서울 극장 무대와 지방 순회공연 무대에서 재담과 함께 〈발탈〉 연행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협률사, 원각사, 광무대, 만리재 흑룡 극장, 마포 도화 극장, 왕십리 광무 극장, 신당동 신부좌 등의 서울 극장 무대는 물론이고, 멀리 만주 지역까지 포함한 지방 순회공연을 하면서 환영받은 연행 종목이 〈발탈〉이다. 이렇게 박춘재는 1900년대 초반부터 1950년 죽기 전까지 계속 〈발탈〉을 연행했다. 〈발탈〉 전승 계보에 있어, 박춘재는 현전하는 〈발탈〉을 성립시킨 연희자이다. 그는 박춘재 계열 〈발탈〉의 틀을 형성해 내고 실제 연행을 하면서, 당시에는 대단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전 〈발탈〉의 성립 및 전성기로 박춘재 시대를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박춘재는 당대의 명창이자 재담꾼으로 인정을 받았다. 특히 그의 재담은 1910년대에서 1920년대에 걸쳐 대중의 인기 연행물로 자리 잡았다. 〈장대장타령〉, 〈장님소아희담〉, 〈각종 장사치흉내〉, 〈개넋두리〉, 〈장님흉내〉, 〈곰보타령〉, 〈병신재담〉 등이 그 구체적인 연행 종목이었다. 특히 〈병신재담〉은 그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재담의 전개 방식이 〈발탈〉과 아주 흡사하여 주목된다. "조고마니까 토막을 낸 줄 아오"라는 대사에서 보듯 〈병신재담〉의 등장인물은 상반신만 존재하는 발탈의 탈(유람객)과 유사하다. 팔도를 유람하는 유람객으로 설정된 것 역시 발탈과 같다. 유람객으로 설정된 등장인물이 또 다른 등장인물을 상대로 유람 다닌 곳을 소개하고, 말꼬리를 잡고 서로 티격태격 재담 싸움을 하는 것이 〈발탈〉 그대로이다. 그래서 사진실은 〈병신재담〉이 발전하여 〈발탈〉이 형성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이 〈병신재담〉이 발탈일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다. 당대의 〈발탈〉 재담이 음반으로 녹음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박춘재의 여러 재담과 함께 〈발탈〉 역시 이때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박춘재의 재담들은 18-19세기 시정의 재담꾼들의 연행이 개화기 극장 무대의 공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박춘재가 지금의 청진동이었던 금부(禁府) 후동(後洞)에서 성장했고, 어려서부터 시정의 소리패들과 풍류랑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발탈〉을 비롯한 박춘재의 재담들은 이후에 활약하는 신불출과 같은 만담 연행자들에게도 그 영향을 끼친다. 이는 조선시대 14·5세기 궁정에서 연행된 우희, 18·9세기 시정의 재담 연행으로 이어진 우리의 재담 전통이 1910년대 재담 공연과 〈발탈〉에 그대로 스며들고, 이것이 다시 만담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보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박춘재 [朴春載] (한국전통연희사전, 2014. 12. 15., 전경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