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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 원증국사탑과 탑비. 보물입니다. 태고사는 조계종의 중조인 보우스님이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참고로 태고사라는 사찰은 충북 금산에도 있고 가까이 서울 성북동에도 있습니다. 헷갈리지 마세요. 태고사는 고려시대에 태고 보우가 세운 절로서,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축되었습니다. 원증국사탑과 탑비 만이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럼 먼저 원증국사탑과 탑비의 주인인 보우국사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우(普愚)(1301-1382)는 보허(普虛)라고도 불리는 큰 스님입니다. 호는 태고(太古)이고요. 조계종의 중조이시기도 하지요. 시호가 원증국사(圓證國師)이구요. 탑호(塔號)는 보월승공(寶月昇空)입니다. 13세에 회암사(檜巖寺)로 출가하여 공부를 많이 하셨습니다. 국내에서의 수행이 부족하셨는지 고령이신 46세 때에는 원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오시기도 했어요. 워낙 유명하신 스님이라 많은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요. 원증국사탑비에 적혀있는 일화 하나를 들어볼까요? 지정(至正) 병술년(1346) 국사의 나이 46세 때에는 연도(원나라의 수도)를 유람하였는데、천축국(天竺國-인도(印度))의 원성 선사(源盛禪師)가 남소(南巢)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보니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호주(湖州)의 하무산(霞霧山)에 이르러 석옥공선사(石屋珙禪師)를 만나보고 이제까지 체험해 얻은 덕을 모두 나열하고、또 태고암가(太古菴歌)를 바치니、석옥이 매우 깊이 인정하고 날마다 하는 일을 물었다。 국사(國師)가 대답한 뒤에 천천히 묻기를、'이 밖에도 따로 또 할 일이 있습니까?'하니 석옥이 말하기를、'노승(老僧)도 그랬고、삼세(三世) 불조(佛祖)들도 또한 그러했다。'하고、드디어 신표(信表)로 가사(袈裟)를 주면서 말하기를、 '좌승은 오늘에야 비로소 발을 뻗고 자겠다。'하였다。석옥은 임제(臨濟)의 18대 손이다(僧侶의 繼承代數)。반달 동안 국사를 머물게 한 후 헤어질 때에는 주장(柱杖)을 주면서、'부디 잘 가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국사가 머리를 조아려 배수(拜受)하고、연도(燕都)로 돌아오니 도중에 국사의 명성이 자자하였다。천자(天子)가 이를 듣고 영령사(永寧寺)에 당(堂)을 열 것을 청하면서 금란가사(金襴袈裟, 금실로 만든 가사)와 침향불자(沈香拂子)를 하사하였고、황후와 황태자는 향폐(香幣)를 내렸으며 왕공 사녀(王公士女)들은 분주히 예배하였다。 아무튼 원나라에서 이렇게 명성을 더한 후 그는 다시 고려로 돌아왔고, 공민왕의 간절한 요청으로 나랏일을 자문하는 국사(國師)가 되었습니다. 이후 공민왕이 신돈에게 나라를 맡기자, 그와 대립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신돈이 제거된 후 다시 국사의 자리를 되찾았지요. 그는 정말 대사(大師)이신지라 82세가 되던 해에 새벽에 목욕을 하고 단정하게 앉아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명성에 걸맞게 제자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승려는 말할 것도 없고, 고려말의 라이벌인 최영장군과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모두 그의 제자였지요. 고려말 질풍노도의 시기에 큰 어른으로 살았던 그가 사망하고 12년이 지난 뒤 고려는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증국사탑비는 1385년에 제작되었고요. 고려 말의 명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글을 썼습니다. 국사에 대한 예우였겠지요. 이 석비는 보우대사의 출생부터 입적에 이르기까지의 내력을 적은 것입니다. 모습을 살펴볼까요? 널찍한 정방형의 지대석 위에 커다란 거북이 모양의 귀부가 올라가 있고요. 그 위에 글이 써져 있는 비신이 세워져 있습니다. 비신 위에는 건물지붕모양의 이수를 놓은 일반적인 탑비형식을 갖추고 있지요. 탑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돌이 좋으니까, 글자가 뒤에도 잘 남아있어요. 돌 좋잖아? 국사의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고 하늘이 강림하는 것 같았도다。 국사의 자취는 부배(浮杯)와 비석(飛錫)처럼 신통하였도다。 돌아와 지우를 받았으니 왕자의 스승이었고 소설산에서 몸소 밭을 가니 은현(隱現)이 때에 맞았도다。 때로는 취성(鷲城)에서도 형명(刑名)을 농락하였으나 구름이 하늘을 가림과 같은 것、국사의 명성에는 무슨 손상을 줄 수 있었던가? 달은 곤륜(崑崙)에서 졌어도 남은 빛이 있고 사리는 영롱(玲瓏)아니 왕문(王門)에 빛나도다。 오직 삼각산만이 푸르게 구름가에 비꼈고 탑을 그 아래 세우니 나라와 더불어 길이 평안하도다。 국사의 풍도는 동방에 널리 퍼졌도다。 신은 배수하고 명(銘)을 지으니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태고사 원증국사탑에 도착했습니다. 원증국사탑은 보우스님의 사리를 봉안했던 부도탑인데요. 1385년 이전에 제작되었고요. 원래는 도굴로 인해 쓰러져 있었는데, 1980년 10월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지요. 부도는 전체적으로 원형이고 상부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입니다. 하대석은 사각형인데, 각면을 3개의 면으로 구분해 놓았습니다. 그 위에 연화문으로 받침대를 만들고 8각의 옥개석을 얻어 놓았는데 옥개석의 모서리에는 귀꽃이 장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도(묘탑)은 통일신라 시대부터 제작이 되는데요. 학문을 중시하는 교종에서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으로 불교의 유행이 번짐에 따라, 모시던 스님들을 기념하기 위한 묘탑을 만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석탑의 기단과 석등의 탑신을 가진 부도탑이 만들어졌는데요. 양양의 진전사지에 가면 지금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불상의 연화대좌와 지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팔각원당형’부도가 많이 만들어졌구요. 조선시대에는 범종모양의‘석종형’부도가 많이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원증국사탑은 ‘팔각원당형’과 ‘석종형’의 중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탑신부를 가만히 보면 둥근 호박모양의 몸체에 화려한 옥개석을 가지고 있죠. 고려말에 제작된 이 부도는 부도의 변천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겁니다. 양주 회암사의 지공선사 부도 역시 유사한 사례로 볼 수 있지요. 인도의 아잔타 석굴에 갔을때가 생각납니다. 그곳에는 다양한 스투파가 굴마다 위치하는데요. 반은 부처님이고 반은 스투파의 모습을 띄고 있어서, '스투파'가 곧 '부처'라는 의미를 전해주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봤던 스투파와 원증국사의 부도는 초기의 부도나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에 비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미술사를 전공하지는 않아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원증국사 부도가 세워지는 시기에 중국을 통해 인도의 스투파의 형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습니다. 물론 정립되지 않은 가설이니, 그냥 흘러들으세요. 나중에 생각이 확고해지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탑이 14세기 말~ 15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재밌는 것만 설명하자면. 고려 말이잖아요? 1392년에 조선 개국하니까 고려 말인데. 려말 선초 시기의 유명한 국사의 부도탑이라는 것도 되게 중요하고 또 북한산에 남아있는 것 중에 되게 중요한 유적이기도 해요. 여긴 길이 없나? 나 이길로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길이 있는 거 같은데? 기억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