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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 #btv뉴스 #SK브로드밴드 [B tv 서울뉴스 김진중 기자] [기사내용] 박종화 앵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대에 따라 큰 변화를 겪은 지역이 있습니다. 용산구 후암동인데요. 지역이 품고있는 역사와 생활 변화상을 짚어보는 기획다큐 서울동행. 김진중 기자와 함께 동행하시죠. 리포트) 남산 아래 위치해 나무가 많고, 전망이 좋은 동네 후암동. 조선시대 후암동에는 국가 제사에 필요한 가축을 기르고, 공급하는 관청인 전생서가 자리했고, 관련된 일을 하는 관리들이 살았습니다. 여전히 비탈진 언덕길의 형태를 띤 후암동 골목 한편엔 과거 전생서가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졌습니다. [엄진희ㅣ용산문화원 해설사] "농번 사회였기 때문에 비가 안 오면 기우제를 드려야 했고 또 얼음이 잘 얼지 않으면 현명 씨에게 제사를 드리는 등 많은 제사가 있었는데, 제사에 사용되는 희생제물이 바로 이 전생서에서 키워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1925년 일제가 조선 식민 지배 상징으로 세운 조선신궁. 1945년 우리가 광복을 맞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자리했던 우리 슬픈 역사의 한 면이기도 합니다. 과거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는 후암동 남산 자락에 흔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와 함께 말이죠. [엄진희ㅣ용산문화원 해설사] "이렇게 조선신궁을 만드는 과정에서 보니 남산 꼭대기에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국사당이 있었던 겁니다. 일본인들 입장에선 자기네 국교 신이 모셔져있는 이곳에(조선신궁) 보다 높은 곳에 조선을 대표하는 사당(국사당)이 있는 게 못마땅했던 거죠. 그래서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기게 된 겁니다." 둥글고 두터운 큰 바위가 있어 이름붙여진 '후암동' 영험한 돌로 여겨지는 두텁바위 이야기를 전하고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마을의 얼굴과도 같은 상징석을 세웠습니다. [최회정ㅣ용산구 후암동 주민자치위원장] "남산 주변이 목멱산이라고 해서 큰 바위가 많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었고, 오래전에 바위도 많이 있었고... 많은 바위에서 주민들이 자손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고 그런 전설이 많이 있어서 앞으로 후암동에 그런 이야기들이 남을 수 있도록 상징석 하나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 주민들과 합세해서 이렇게 상징석을 세우게 됐습니다." 한 때 후암동이란 명칭이 사라졌던 때도 있습니다. 세월에 세월을 덧댄듯 골목 곳곳에 자리한 크고 작은 집. 경사로가 많은 후암동에 집을 짓기 위해 쌓았던 석축은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후암동엔 70% 이상의 거주민이 일본인이었습니다. [엄진희ㅣ용산문화원 해설사] "일제강점기인 1914년도에는 일본인들이 이 지역을 삼판통이라고 이름을 바꿔버리게 됩니다. 삼판통의 의미는 일본 본토에 가서도 언덕을 갖고 있는 동네 이름을 아울러서 부르는 이름인데요. 관사라던가 문화주택들이 많이 지어지게 되었고 일본인들이 꽤 많이 살던 지역이라고 보실 수 있습니다." 후암동을 걷다 마주하게 된 삼광초등학교. 1919년 개교할 당시 이 학교의 이름은 삼판심상소학교였는데요. 이후 1945년 광복이후에야 삼광국민학교라는 이름으로 재개교했고, 일대 역시 후암동이라는 이름을 다시 찾게됩니다. [염길환ㅣ용산구 후암동 주민자치위원]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는 그때는 일본 사람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 뒤로 이제 물론 이 학교가 일본 사람이 생긴 학교라는 것은 알았지만 흔적이 남았다거나 그런 것은 없어요." 광복 이후 70년간 우리 소시민들이 살아온 주택으로 많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후암동 일본인들의 고급 주거지에서 해방 이후엔 피난민들의 정착지로 변모했습니다. [염길환ㅣ용산구 후암동 주민자치위원] "아래쪽에는 저택이 컸기 때문에 부자들이 살았고 저 위에 올라가면 판자촌이었어요. 비탈이 심했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렇게 홑이불 같은 거를 펴놓고 거기서 얘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답게 지내기도 하고" 후암동 마을버스 종점에 다다르면 펼쳐지는 '후암동 108계단' 일제강점말기 일본군 전쟁 희생자를 기린다며, 세워진 이 계단은 시간이 흘러 승강기가 놓이고, 후암동 동네를 잇는 다리가 됐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그 어느 곳보다 빠른 변화를 겪은 '후암동' 한 계단 한 계단 힘들게 지나온 시간 뒤엔 분명 아름다운 모습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그 순간도 찾아온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김진중 기자ㅣ[email protected]) (촬영편집ㅣ이두헌, 전현표 기자) (2023년 9월 1일 방송분) ▣ B tv 서울뉴스 기사 더보기 / skbroadband서울방송 ▣ B tv 서울뉴스 제보하기 채널ID: 'btv서울제보' 추가하여 채팅 페이스북: 'SK broadband 서울방송' 검색하여 메시지 전송 전화: 1670-0035 ▣ 뉴스 시간 안내 [B tv 서울뉴스] 평일 7시 / 11시 / 15시 / 19시 / 21시 / 23시 [주간종합뉴스] 주말 7시 / 11시 / 15시 / 19시 / 24시 #도봉구_강북구_노원구_광진구_성동구_동대문구_서울중구_종로구_서대문구_강서구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