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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에게 "참나(진아)"와 "무아" 논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상을 만들어 저의 의견을 올립니다. 다만 이 1번 영상에서는 "참나 vs 무아 토론"을 하는 저의 기본 입장에 대해서만 말씀드립니다. 저는 (1) 구도자의 입장에서, (2) 불제자를 대상으로 말하며, (3) 제가 무아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시할 예정입니다. (4) 그리고 마지막에 부처님의 궁극적인 교설은 "무아"가 아니라 "연기법", 또는 "중도"라는 점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전체적인 윤곽만은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힌두교의 전신인, 부처님 당시 브라흐만 교(이 두 종교는똑같이 웨다(Veda)를 성전을 받듭니다)의 교설에서는 앗따(attā)를 말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앗따에다 뒤에 오는 말을 부정하는 an을 붙여서 안앗따(anattā : 무아, 또는 비아=아가 아님)를 설하심으로써 앗따를 부정하셨습니다. 이 앗따는 브라흐만교가 힌두교로 탈바꿈하면서 개체로서는 소문자 아트만(ātman)(아트만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에도 있습니다), 우주 전체로서는 대문자 아트만(Ātman), 또는 브라흐마(Brahma)가 됩니다. 인도어를 중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앗따, 아트만은 맨앞음절을 강조하여 아(我)로 번역되었고, 브라흐마는 범(梵)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때문에 "무아"라는 말에서의 "아"가 나(我, I, me)라는 뜻으로 이해되는 데서 그치는 경향이 있지만, "아"는 그런 아를 의미하는 것과 함께 보다 중요하게는 자성(自性, sat = 자기만의 고유한 성질), 즉 "어떤 사물의 불변하는 기체(基體)"를 의미합니다. 아는 곧 참나, 진아, 주인공, 영혼 등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떤 것의 내부에 있으면서 그것의 외피를 이루는, 변화하는 어떤 것(현상 : 예를 들면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는 정신-물리적인 현상)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영속되는(불변하는), 외피를 이루는 그것들의 기체(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이론을 논파하셨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 연기법에 근거하고 있음에 비추어 너무나 당연합니다. 연기법은 조건에 따라서 모든 사물이 일어난다고 규정합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면 거기에 블변하는 기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인데, 힌두교가 말하는 아트만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이 욕탐에 사로잡힌 중생성에 의해 덮여 계박되어 있다가 중생이 욕탐에서 벗어나면 아트만이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불변하는 아트만과 변화무쌍한 욕탐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단 말입니까? 변화하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둘을 연결하는 끈이나 고리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 두가지 존재한다면 그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럴 것입니다. 둘은 전혀 별개의 것이고 성질 또한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래서 그 둘은 결합할 수 없습니다. 설령 아트만이 내 안에 있다고 해도 변화하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욕탐에서 벗어나 아트만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그때 드러나는 아트만과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습니다. 아트만, 진아, 참나는 외부 조건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 세계 배후 또는 내부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님이 조건에 따라 일어나는 것들의 연기 내지 무상을 말씀하신 것은 그 배후에 참나, 진아, 영혼, 주인공 따위를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억설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현상계 자체 안에서 모든 문제를 제기하고 푸셨습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현상계를 벗어난 것이어서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은 "토끼의 뿔"처럼 말은 있으나 그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는 허망한 개념일 뿐입니다. 하지만, 강의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은 믿지 않는 이의 입장에서는 "하나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견해"에 불과하다는 말씀이며, 사정은 힌두교 쪽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즉, 부처님의 말씀인 무아와 힌두교의 가르침인 진아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진리)"인지는 아무도 판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힌두교의 진아, 참나 설을 삿된 가르침으로 평가절하하지는 않습니다. 그 가르침에 입각하여 라마 크리슈나, 라마나 마하리쉬 같은 성자가 나온 것만으로도 그 이론을 팜부로 폄하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불제자, 즉 부처님의 가르침을 표준으로 삼기로 결정한 사람이 진아, 참나를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아와 그것의 바탕을 이루는 연기와 중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어려움 때문에 보다 이해하기 쉬운, 세상 사물을 거짓된 것(부분)과 참된 것(부분)으로 나누는 방법이 기반하여 고통스러움을 당하고 있는 현재의 나를 "거짓나"로 보고, 그 배후 또는 내부에 "참나(진아)"가 있다는 가르침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쉬우면 진리이고 어려우면 진리가 아니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알고 보면 부처님을 제외한 역사상 저명한 모든(제가 아는 한) 철학자들은 이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플라톤은 현상과 이데아를 말했고, 서양 철학은 사물을 두 국면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이 이분법에 기초하여 전개되었습니다. 단지 현상, 이데아라는 말이 다른 말로 바뀌어갔을 뿐이죠.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부처님만은 이런 이분법을 넘어선 중도법을 제안하셨습니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살고 경험하는 이 세계를 "헛된 것"으로 보지 않고 "실제"로 보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간간이 "일체는 허망하다"거나 "일체는 꿈 같다"고 말씀하신데 유념하여 부처님께서 이 세계를 실제적으로 보셨다는 저 이 말에 반박하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 하지만 그런 말씀들은 이 세계에 집착하는 중생을 위한 방편, 즉 왼쪽으로 구부러진 나뭇가지를 오른편으로 잡아당기는 가르침입니다. 그에 비해 연기법, 중도법은 왼편, 오른편을 가리지 않는 가르침이며, 이 가르침에 입각해 볼 때 부처님께서는 나, 인간, 세계, 사물대해 그 일어남과 유지됨 보아 없다고도 보지 않고, 그 사라짐 또는 변화를 보아 있다고도 보지 않는, 때로는 막고 때로는 여는(이른바 개차법) 입장에서 나, 인간, 세계, 사물을 보아야 한다고 설하셨던 것입니다. 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이해하면 무아, 연기, 중도는 어렵기만 한 교설만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정빈 소설가 시인 동화작가 수필가 전 목포과학대학 교수 1985년, 소설 《단(丹)》 년간 베스트셀러 1위 문학 철학 예술 명상 등 여러 분야에 걸쳐 70권의 책을 내었음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