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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한국전쟁 당시 10대 소년으로 참전했던 학도병들은 이제 대부분 아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존 학도병들은 정식 입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그 희생을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창희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교복을 입고 학생모를 쓴 앳된 소년들. 6.25 직후인 1950년 7월 입대한 전남 지역 최초 학도병입니다. 당시 국군은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한 상황. 전남지역 학도병 183명은 목총으로 훈련한 지 9일 만에 전장에 투입됐습니다. 학도병 중대는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6사단을 만납니다. 이른바 '화개전투'로 불리는 교전에서 3시간 만에 학도병 수십 명이 숨졌습니다. [정효명/당시 여수중 4학년·학도병 생존자 : "도저히 상대가 안 되죠. 180여 명이었는데 거기(집결지)에 온 사람이 110명 뿐..."] 학도병들이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인민군의 경남 침공을 알린 덕분에 국군은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급도, 군번도 없었던 학도병들의 값진 희생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정식 입대로 간주되지 않아 6.25 이후 재입대한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6.25 전쟁사에도 화개전투는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끈질긴 요구끝에 2007년 유해 발굴이 이뤄졌지만 신원이 확인된 건 1구 뿐이었습니다. 신원 미상의 9구와 미발견 전사자들은 참전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정효명/당시 여수중 4학년·학도병 생존자 : "후회 많죠. 국가를 위해서 죽은 사람들한테 뭘 해줬냐 이거예요. 그때 우리가 참 어리석었어요. 참 어리석었어요."] 화개전투 생존 학도병은 30여 명. 추가 유골 발굴로 아직 시신도 못 찾은 급우이자 전우들이 돌아올 수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KBS 뉴스 양창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