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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교회 내에는 잘못된 성령 이해와 혼탁한 영성운동의 조류가 많은 가운데, 올바른 성령론을 교회의 신앙 속에 확립시켜 가야 할 큰 과제에 직면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는 영산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는데, 이런 이유에서 최근에 영산의 60년 사역에 나타난 성령론의 변화와 발전에 대해서 논문을 제출한 바 있다. 배본철, “영산 조용기 목사 60년 사역에 걸친 성령론에 나타난 핵심 논제 분석”, 영산신학저널 Vol. 33 (2015): 7-36. 그 논문은 특별히 영산이 그동안 뜨거운 성령론 논쟁의 표적이 되면서 어떤 성령론의 변화를 갖게 되었는지, 또 여러 시대를 거쳐 가면서 그가 어떤 성령론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는지를 분석하여 재평가하겠다는 동기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와 신학계의 성령론을 다룸에 있어서 영산의 성령론과의 관계를 조명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분석도 평가도 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영훈도 역시 영산의 성령론이 지닌 의미의 중요성에 대해,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은 사변적 이해에 머무르던 성령을 교회 사역의 현장과 성도의 삶에 체험적으로 역사하는 성령으로 이끌어 냄으로, 성령 이해에 대한 획기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영훈, “조용기 목사의 성령론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영산신학저널 제1권 2호 (2004): 145. 고 평했다. 또 그는 민경배와 박명수의 글을 참조하여 강조하기를, “이 같은 조용기 목사의 성령 이해는 20세기 후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령 운동에서 갑자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는 세계 오순절운동의 성령 운동이 한국교회에 접목되어진 것이고, 안으로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이래로 한국교회에 도도히 흘러온 성령운동을 집대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영훈, 145; 민경배, “조용기 목사의 성령신학과 한국 교회”, 영산신학저널 제1호 (2004): 32-60; 박명수,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3), 219-38. 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영훈의 평가는 한국교회 성령운동사 속에서 영산의 성령론이 지닌 중요성을 감안할 때 매우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령론의 역사를 다룸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는 성령론 논쟁의 시대를 살펴보는 일이라고 본다. 이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안점을 제시한다; 즉 그 논쟁의 시기는 1970-80년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진원지는 주로 장로교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교)와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교)의 교수진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며, 또 그 논쟁의 궁극적인 표적은 조용기 목사와 순복음교회가 강조하고 있던 오순절주의 성령론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필자가 한국교회 성령론 논쟁의 시기를 1970-80년대로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다시 말해서 1970-80년대에 이르러서 갑자기 성령론 논쟁이 한국교회 내에 일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러 가지 교리적 또 학문적인 동기도 들 수 있지만, 가장 현실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무래도 한국교계 내에 영산 조용기 목사를 중심으로 한 순복음교회의 급속적인 성장이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기존 교계를 크게 자극시킨 데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순복음교회가 급성장을 해가던 1960년대부터 영산의 성령론은 이미 기존 교계의 표적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생과 구분되는 성령세례의 체험과 성령세례 받은 뚜렷한 증거로서의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따르는 영산의 성령에 대한 신념은 기존 교파들에서 가르치던 성령론과는 교리적으로 매우 달랐던 것이다. 당시 예장 총회신학교와 고려신학교 등을 중심으로 한 장로교 계통의 신학교에서는 이전의 평양 장로회신학교로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성령론을 수정하면서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이 새롭게 소개되고 있었고, ‘정통 개혁주의 성령론’을 주장한 이들은 Abraham Kuiper, Charles Hodge, B. B. Warfield, Richard Gaffin, John Stott 등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 신학자들을 통해 성령 은사의 중단성과 함께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하는 성령론의 한 노선을 발전시켜 왔다. 웨슬리안 계통의 감리교나 성결교의 신학교에서는 웨슬리의 성결론과 웨슬리안-성결운동 ‘웨슬리의 성결론’은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서로 구분되는 개념이다. John Wesley의 성결론은 무엇보다도 웨슬리 본연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노선이라는 점에서 19세기 미국 복음주의의 산물인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과는 그 성격의 차이를 지닌다. 예를 들어서 ‘성령세례’라는 용어는 웨슬리의 상용어가 아니라, 웨슬리와 John Fletcher와의 성령세례론 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후, 마침내 19세기의 복음적 부흥운동의 경향이 성결론에 첨가된 결과로 인해 활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죄성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은 당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에 반대하기 위해 인간의 부패성을 더욱 분명히 강조하게 되었고, 마침내 웨슬리의 표현보다는 훨씬 과격한, 즉 죄성은 인간의 몸속에 있는 어떤 요소로 이해하고, 성화는 이것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노선의 성령론이 가르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산과 순복음교회에 대한 장감성(長監聖) 교계로부터의 비판은 자연스럽게 오순절주의 성령론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영산이 1967년 2월부터 신앙계를 발간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가 이 간행물을 발간한 목적은, 창간호 ‘취지문’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대중들에게 순복음의 오순절주의 신앙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취지문”, 신앙계 창간호 (1967.2): 2.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존 교단으로부터 오는 교리적, 신학적 공격으로부터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변증하여 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보호하려는 이유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다 보니 초창기의 신앙계는 주로 오순절주의 성령론의 교리에 입각한 논문이나 설교와 간증문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영산 자신이 신앙계에 1967년 5월호부터 장기간에 걸쳐 성령론을 연재하기 시작한 것도 주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본다. 영산은 오순절주의 성령론에 입각하여 중생과 성령세례는 엄연히 다른 체험이라고 가르쳤다. 영산이 지도한 것으로 밝힌 신앙계 속의 상담 내용에도 보면 중생과 성령세례는 분명히 다른 체험이며, 중생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성령세례는 권능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상담실”, 신앙계 창간호 (1967.2): 22. 이 당시 영산은 신앙계의 국내 성령론 필진으로서는 제일 처음으로 부산 산정현장로교회 목사인 이인한을 받아들였는데, 다음의 글을 참조하라; 이인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 신앙계 제2권 2호 (1968.2): 5-7; 이인한, “성령세례와 성화와의 관계”, 신앙계 제2권 제4호 (1968.4): 10-14. 그 까닭은 이인한이 해방 이후 개혁파 계통에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서 구체적인 저술을 많이 내어놓은 대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장로교 목사인 이인한의 성령론이 오순절주의 성령론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성령세례를 명백히 구분하는 그의 성령론이 순복음교회에서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고 본다. 이인한의 글이 시작하기에 앞서서 편집자는 곁들이기를, “이 말씀의 제 1차적 의의는 성령세례를 받을 대상자에 대한 언급에 있다.” 이인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의 세례”, 5. 고 하였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장로교 목사의 글을 게재하는 이유는, 성령세례의 방언과의 관련성보다는, 중생과 성령세례에 대한 구분에 강조점이 있다는 점을 은연중 암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언 문제만 다루지 않는다면 이인한의 성령론도 순복음교회의 신앙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간주한 것이다. 영산은 그가 교회 개척을 시작한 1950년대 말부터 일관적으로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첫 표적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196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방언에 대한 강조 때문에 주위로부터 빗발치는 비난이 그의 목회사역에 큰 부담감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영산은 “오늘날 성령의 충만한 체험으로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성령의 은사가 활발히 나타나게 됨과 동시에 풍성한 방언의 은사가 부어지게 되고, 또한 이 방언의 문제가 교회 중에 적지 않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조용기, “방언하는 유익이 무엇이냐?”, 신앙계 제1권 4호 (1967.5): 4. 라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었다. 마침내 영산은 방언주의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한국교계의 따가운 지목을 받기에 이른다. 영산이 방언을 얼마나 강조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당시 신앙계에 주로 방언과 성령세례를 연관시킨 가르침의 영향이 신자들의 고백 속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순복음교회의 급성장과 함께 방언을 중심으로 한 오순절주의 성령론의 확산은 한국 교계 전체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러자 기존의 교회 신자들 가운데 순복음교회로 옮겨가는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고, 이를 크게 우려한 개혁주의 계통과 웨슬리안 계통의 교계와 신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시급한 대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오순절주의 성령론의 확산에 대한 신학적 반격의 선봉에 나선 이가 바로 장로교 총회신학교의 박형룡 교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장로교 정기간행물인 신학지남(神學指南)에 신학지남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1918년부터 발행하기 시작한 신학지이며, 한국 보수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정기간행물 중의 하나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령론을 게재하기 시작한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전체에 이르기까지 영산의 오순절주의 성령론을 배격하기 위한 이른바 ‘성령론 논쟁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