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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그가 오신 이유 05:20 갈보리 산 위에 10:28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15:20 고요한 밤 거룩한 밤(후렴) 오늘 예배의 순서가 다 마친 후 돌아오는 주에 결혼식을 치르는 예비부부를 소개하고 축복하는 시간이 있었다. 자매가 가정을 위해 기도를 부탁하며 자신들의 가정이 북한에 헌신하도록 해달라 눈물로 기도제목을 내놓았을 때 그들을 향해 손을 뻗고 진심을 다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이 말한 대로 북한을 유업으로 받는 가정이 되게 하옵시고, 북한 거리마다 헤매고 있는 꽃제비 아이들의 아비 어미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숨겨진 ‘남은 자’들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될 때 감격스럽다. 북한을 위하여 마음을 품고 북한의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북한이 열렸을 때 실제로 들어가 그들을 마주하며 사역하는 것의 괴리는 생각보다 많이 클 것.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지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다. 북한과 우리가 너무나도 멀기 때문. 이름 난 탈북자 결혼식이 어느 호텔에서 너무 성대했다 들었다. 한국 대표교회 목사께서 주례하셨고 온갖 유명인들이 왔다고. 이런 류의 낯선 괴리도 우리 내면에서 처리를 해야 한다. 북한인권 단체들의 만행들을 들으면 또 다른 종류의 괴리가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북한은 역시 멀다. 오늘 그 예비부부의 입에서 내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도제목이 나왔을 때에 이런 괴리를 다루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물론 적지만, 적지 않다고 느껴졌다. 진중하고 진지한 신앙을 가진 이들만 북한을 품을 수 있다. 성탄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나는 눈물이 더 많다. 십자가에 죽으려 태어난 아기 예수. 죄가 없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걸거치다는 표현으로 도무지 설명이 다 되지 않는 육신을 입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고난이다. 조금만 불편한 옷을 입어도 하루종일 힘든데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것은 인간인 우리가 상상하는 고통과 불편을 뛰어넘는 괴로움. 그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말구유에 처음 누이셨다는 것도 기가 막힐 일이지만 인간처럼 사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그날 12시간을 잔혹한 폭력에 얻어터지셨다는 건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 그럼에도 예수님은 묵묵히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셨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라는 찬송가는 사실 눈물이 철철 흐르는 노래. 이에 대해 기쁨의 눈물이 없어졌다면 우리는 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눈물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신앙의 길을 걸을 때에 두 가지 타입이 있다하면 십자가 은혜에 매달리는 유형과 십자가로 시작된 사명을 붙잡는 유형. 나는 후자를 추천한다. 은혜의 감동이 주어지지 않으면 신앙이 식어지는 것은 위험하다. 사명이 나를 이끌도록 하면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라도 묵묵히 걸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인생을 이끌도록 하면 헤매는 시간이 적다. 눈물 콧물 다 흘려도 사명이 없이 개인의 구원에 머물러 있으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순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루는 인생으로 부름을 받았다. 신앙은 곧 전쟁이다. 신앙의 전쟁 중 한반도에서 가장 공적이고 보편적인 전쟁은 북한과의 그것이다. 방황은 부르심을 잊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청년들이 이제 높으신 부르심을 인식할 때가 됐다. 나는 북한을 살리기로 작정한 그 부부를 잘 알지 못하나 그 부부가 북한이 열렸을 때에 헌신할 것을 미리 보고 기뻐하고 축복한다. 그들이 버려진 아이들을 안고 먹이며 사랑을 베푸는 것이 그려진다. 성탄의 기쁨, 성탄으로 인한 눈물의 고백이 북한 전역에 퍼질 날을 기대한다. 김일성 김정일 동상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며 김정은 초상까지 정성사업을 해댔던 북한 사람들이 거리마다 기쁨으로 주님을 예배하며 신원의 눈물을 흘릴 때 그 현장에 있을 수 있다면 가장 감격스러운 날이 될 것 같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했던가. 나의 부르심이 북한 여는 것까지만 있을지, 북한이 열렸을 때 안에 들어가 일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감격스러운 예배의 현장에 있을 수 있다면 기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