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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기억을 몇 번이고 더듬었지만 틀림없었다. 파도가 잠시 물러난 모래사장의 경계처럼 모두 또렷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손끝이 이마에 닿을 때마다 미묘한 통증이 전해졌다. 편지를 읽는 동안 욕조 속의 물이 미지근해졌다. 나는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깁스 아래 가려진 엄지를 구부리자 짧은소리와 함께 통증이 번졌다. 그 고통이 피부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나는 지금 욕조에 누워있고, 그날은 이미 지나갔다는 사실이 조금 분명해졌다. 그날의 나는 분명 그렇게 소리쳤다. "이 거지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거야!" 우습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여자에게 지고 싶지 않아 출처를 알 수 없는 용기와 객기를 부렸다. 연이 내 앞에 있었는데, 나는 그 자리의 주인공이라도 되고 싶었던지 야심차게 모든 시간을 부정하는 말을 해버렸다. 연과 함께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더럽혔다.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수아를 만나고부터 자라난 생각에 그 여자가 도화선이 되어 터져버린 것이었다. 아직도 그 여자가 내게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산하는 그 여자를 데리고 골목에서 한참 말다툼을 했다. 다음번에 산하를 만났을 때 그 여자와는 관계를 정리했다는 말만 들었다. 그 이유는 묻지 않아 그 여자의 정체와 의도는 미궁 속으로 빠져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물론, 굳이 물어 알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 여자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내게는 큰 자극이었다. 사회에서 정해진 역할이 있는 사람들, 그 역할 덕분에 나 자신을 어렵지 않게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숨 쉬는 표정, 안정된 말투, 그 모든 것들이 날 간지럽혔다.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 그건 그때에 내게는 과분한 일이었다. 나는 한동안 경계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도 그랬다. 그 여자의 비웃음 섞인 미소에 내 마음이 한없이 작아져 몰린 것이다. 나는 미지근한 물 속에서 몸을 움츠렸다. 그때의 나는 어쩔 수 없는 20대 중, 후반을 지나는 여자애에 불과했다. 그 시절의 여자애들이 대게 그러듯 스스로를 낡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인생의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은 가을의 한복판에 서서 이미 도전과 멀리 떨어져 달아나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친구들의 대화는 집을 어떻게 살지, 어떤 주식이 오를 기미가 보이는지와 같은 현실적인 주제로 가득했을 것이었다. 그런 문제들은 오히려 내게는 비현실적인 미지의 존재였다. 그 남자의 죽음 이후로 그들은 나아갔지만,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세상의 흘렀고, 나는 멈췄다. 물론, 지금 30대가 된 나는 그때의 나를 이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 하더라도 더 나은 생각과 더 나은 삶을 누릴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한심하다는 것 알지만 지금도 그 남자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내 삶의 바닥에 얕게 깔렸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존재했다. 연과 함께한 시간은 분명 행복이 충만한 시절이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행복은 어디서 온 걸까. 그 남자가 죽지 않았더라면 나는 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행복은 그 남자의 죽음 덕분인 걸까. 그 불행이 없었다면, 연을 만나지 못했을 텐데. 연을 만나지 않고 나의 시간도 다른 친구들과 비슷하게 흘러갔다면, 과연 나는 그만큼 행복할 수 있었을까. 장담하건대 나는 연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값진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날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남자의 죽음이라는 불행까지 사랑해야 하나. 아니면 그 불행을 얻은 행복조차 부끄러워해야 하나. 연의 편지에는 나와 같은 물음이 적혀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젖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잠시 내려놨던 연의 편지를 가져왔다. ○ 너는 작고 여린 몸으로 차마 감당하기 힘든 일을 겪었고 그 덕에 나를 만났다. 그렇다면 나는 너를 부숴버린 그 일까지 안아야 하는 걸까.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네가 벗어나고 싶다던 ‘거지 같은 인생’ 안에 나도 포함되어 있었던 건 아닐까. 네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물러나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러, 네가 나를 배신하게 된다면 ―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안아줄 수 있을까. 나는,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이수야, 며칠 밤을 괴롬 속에서 헤맸지만,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질문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에 굳이 대답하라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에 굳이 침묵하려 한다. 하지만 또 어떤 질문은 너무나도 중요해서, 대답하지 않아도 계속 마음속에서 되풀이된다. 그럴수록 그만큼의 괴롬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 행복을 떠올리면 불행이 늘 뒤를 잇는다. 엄마의 죽음, 그 남자의 죽음, 그리고 그 위에 겹겹이 쌓인 내 시간들. 나는 그 모든 걸 딛고 겨우 연을 만났는데, 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너무 버거웠다. 내가 누린 행복이 그 남자의 죽음 위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행복이 온전한 거짓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건 진짜였다. 혼란하다. 혼란스러웠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방향 없이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욕조의 물이 너무 많이 식어 몸이 떨렸다. 거울에 낀 김이 점차 사라지고, 공기가 차가워졌다. 손을 들어 물 위로 올리자 손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작은 파동이 내 시야에 오래 남았다. 불행은 원인이었고, 행복은 결과였다. 나는 이제야 그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는 받아들이고, 원인은 미화하지 않는다. 혼란한 생각들 속에서 그것만이 내가 붙잡아야 할 최선이었다. 더는 욕조에 누워있기 힘들 정도로 물이 완전히 식었다. 나는 편지를 천천히 접어 봉투에 넣고 손끝으로 눌렀다. 날카로운 종이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나는 욕조에서 일어나 대충 몸을 씻고 나와 화장대 앞에 앉았다. 어깨에 젖은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젖은 머리를 펼쳤다. 나는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덤덤히 머리를 말렸다. 단 한 순간도 나와 눈이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일은 동욱을 만나기로 했다. 동욱과 잠시 떨어져 연락하지 않은 지 벌써 3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내일 동욱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고 제대로 동욱을 보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연의 편지를 읽고 그 시절을 떠올리는데 생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 남은 기억이 밤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 만남을 미룰 수도 없었다. 그래, 혼란한 생각 속에서 내가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자. 나는 입을 오므리고 한참 머리를 말리며 내 눈을 봤다. 한참 그렇게 머리를 말렸다. 글은 매주 영상이 업로드 될 때마다 아래 링크에 편집되어 올라갑니다. 생략된 부분이 있어, 아래 링크에서 글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https://blog.naver.com/iamyourseptember @iamyourseptember 00:00 김필선 - 김필선 02:51 그 사람에게 - 허회경 06:39 먹구름 - 초승 (CHOSNG) 10:05 뜨개 - 강민정 14:05 수민에게 - 수 (sooth) 17:35 스카프 - 빈이 20:38 스물일곱 - 유지희 24:10 들리지 않니 - 민채 글 :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