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어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할까?] 3월 성모 신심 미사, 전삼용 요셉 신부, 2026 03 07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Если кнопки скачивания не
загрузились
НАЖМИТЕ ЗДЕСЬ или обновите страницу
Если возникают проблемы со скачиванием видео, пожалуйста напишите в поддержку по адресу внизу
страницы.
Спасибо за использование сервиса ClipSaver.ru
2026년 가해 3월 성모 신심 미사 – 어떤 진리가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할까? 교우 여러분, 오늘은 성모 신심 미사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이 말씀은 결코 성모님을 부인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새 창조'의 청사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방식은 바로 '희망과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집착'입니다. 아기가 엄마 배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주던 안락한 자궁과 탯줄에 대한 집착을 끊어야 합니다. 만약 아기가 탯줄이 생명줄이라 믿고 끝까지 붙잡고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그 아기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자궁 밖 세상이라는 더 넓은 차원을 향한 '희망'과, 그곳에서도 내가 잘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비로소 탯줄을 놓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흥미로운 우화 하나를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엄마 태중에 쌍둥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회의론자였고, 다른 한 아이는 희망론자였습니다. 회의론자인 아이가 물었습니다. "너는 정말 태어난 후의 삶을 믿니?" 희망론자인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당연하지. 분명히 여기보다 더 밝고 넓은 세상이 있을 거야. 그리고 거기선 우리 발로 걷고 입으로 음식을 먹게 될 거야." 그러자 회의론자가 비웃었습니다. "발로 걷는다고? 입으로 먹는다고? 말도 안 돼. 탯줄이 우리 생명인데 이걸 떠나서 어떻게 살아? 엄마라는 존재도 본 적 없잖아?" 이때 희망론자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는 믿어. 우리가 이곳의 집착을 버리고 나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존재가 될 거라는 걸. 그리고 엄마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될 거야." 결국 희망을 품고 탯줄을 놓한 아이는 세상에 나와 부모를 닮은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했지만, 끝까지 집착하며 머물려 했던 존재는 태어나지 못하고 사멸했습니다. 성모님이 바로 이 희망론자 아이와 같으셨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한 몸이 되고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진리를 희망하셨기에, 그분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다는 도저히 믿기 힘든 소식을 믿음으로 붙잡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사다리와 같습니다. 희망은 사다리의 '세로대'이고, 믿음은 그 사이에 끼워 넣는 '가로대'입니다. 양옆의 세로대가 튼튼하게 서 있어야만 가로대를 붙여 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결코 하느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모님은 겸손하셨지만,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간절히 희망하셨습니다. 그 희망이라는 세로대가 확고했기에 가브리엘 천사의 수태고지를 믿음의 가로대로 삼으실 수 있었고, 그 진리가 성모님을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했습니다. 진정한 겸손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음을 믿고 바라는 것이 진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형제요 어머니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 하느님이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우리를 재창조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으로 살고 싶다면, 우리는 반드시 하느님을 낳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자녀를 낳을 수 있어야 온전한 인간이 되듯, 하느님의 자녀 역시 하느님을 낳을 수 있어야 온전하게 하느님이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희망하고 믿게 되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집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실화입니다. 그녀는 폐결핵이라는 고통스러운 병고와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평온했습니다. 주변 수녀들이 그 고통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영혼들의 어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새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이런 고통은 저에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 『마지막 대화』 1897년 7월 11일 및 『편지』 193호 참조) 데레사는 자신이 하느님 자녀를 낳는 어머니이자 그리스도의 형제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희망하고 믿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이 위대한 진리가, 그녀를 죽음의 공포와 육신의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킨 것입니다. 감실이 된 성모님도 이와 같으셨습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실 때 성모님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이셨습니다. 돌아오면 불륜으로 오해받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지만, 내 안의 하느님을 전하여 엘리사벳의 태중 아기를 기쁘게 뛰놀게 하고 그들을 하느님 자녀로 낳겠다는 사명이 그분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사제의 직무에 대해 "먼저 자신이 하느님이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을 하느님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제의 백성'으로서의 소명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도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그 놀라운 신뢰와 믿음을 받아들입시다. 우리가 그분의 형제자매이며, 심지어 그분을 세상에 낳아줄 수 있는 어머니임을 희망하고 믿읍시다. 성 암브로시오는 『루카 복음 주해』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영혼은 누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하고 낳는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은 『복음서 강론』에서 "사랑의 목소리로 주님의 사랑을 이웃의 마음에 불어넣어 그분을 낳게 하는 이가 바로 그분의 어머니가 된다"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가족을 넘어 하느님을 낳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이 압도적인 진리 앞에 설 때, 비로소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집착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이 거룩한 희망과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새로운 영생으로 나아가는 가장 완전한 준비이자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처럼 하느님을 낳는 사명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의 탯줄을 끊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빛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