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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인목왕후 #소성대비 #광해군 #인조 #정명공주 #김제남 #영창대군 #인조반정 #유영경 #칠서의옥 #계축옥사 #강변칠우 #의인왕후 #서궁 오늘의 왕비로 배우는 한국사, 조선왕비실록은 선조(宣祖) 이연(李昖)의 두 번째 아내로 광해군과 철전지 원수가 된,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 이야기입니다. 워낙 얽힌 이야기들이 많아서 3회에 걸쳐 정명공주 이야기까지 제공할 예정입니다.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계비이자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金氏)는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광주 노씨의 차녀입니다. 김제남은 권신 김안로의 종손인데 그녀의 언니는 명종비 인순왕후 심씨의 아버지인 심강의 친손자인 심정세에게 시집을 가서 인순왕후와 인목왕후는 법적으로는 조카 며느리가 됩니다. 광해군과 인조 때까지 생존해서 흔히 ‘인목대비’라고 불리는데, 대비 존호는 ‘소성대비(昭聖大妃)’라서 소성대비라 불러야 되지만 여기서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인목대비로 부르겠습니다. 법적으로는 광해군의 계모이지만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는데 왕비로 간택될 당시의 나이는 19세로 반가의 규수도 17~18세에 미혼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척 늦은 나이였습니다.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후사를 낳지 못하고 죽어서 적자가 급한 상황이라 바로 임신할 수 있는 나이의 처녀를 왕비감으로 간택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영창대군의 출산 인목왕후는 기대대로 혼인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임신을 해서 1603년 정명공주를 낳고 1604년에는 둘째 왕녀를 사산하지만 1606년에 적통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출산했습니다. 선조가 어린 인목왕후에게 새장가를 들고 1년 뒤의 선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인목왕후와 재미를 보느라 정력에 좋은 탕약을 매일 지어다 먹고 경연도 대충 나갔다고 합니다. 이에 사관이 “왕이 어린 왕비와 노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어 병이 나고, 국모의 자리가 비었다면 후궁 중의 한 명을 왕비로 올리면 되는데, 왜 굳이 새로 왕비를 간택하느냐”며 계속 비판을 했습니다. 왜란이 끝난지 2~3년 지난 시기라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은 어린 여자와 재혼하더니 몸이 허하다느니 피곤하다는 소리나 늘어놓으니 이렇게 말할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후궁 중에서 한 명을 왕비로 올리자니 세자 광해군의 생모 공빈 김씨가 후궁인 상태로 죽었는데, 정빈 홍씨나 정빈 민씨에게도 아들이 있어 이 후궁들을 간택하면 곤란한 일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