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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첫 시간입니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종교개혁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종교개혁사를 개관할 예정입니다. 종교개혁사개관 (1)-루터 츠빙글리 칼빈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사는 외형적으로는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내걸고 종교개혁 포문을 열 때부터 1648년 30년 전쟁이 끝나고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질 때까지이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루터, 츠빙글리, 칼빈에 의해 주도된 대륙의 종교개혁,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프랑스와 네덜란드 종교개혁, 재세례파에 의해 진행된 급진종교개혁운동, 그리고 로마 가톨릭의 반종교개혁운동으로 대별된다. 종교개혁사는 종교개혁의 발단과 위에서 언급된 종교개혁의 역사적 흐름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가 종교개혁이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 주로 로마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관점이다. 로마 가톨릭은 종교개혁을 루터 자신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강하며 종교개혁을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맞선 교리적 개혁, 도덕적 개혁으로 보지 않는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을 거둔 요인도 윤리적, 교리적 개혁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반교권주의(anti-clericalism)와 독일의 민족주의(nationalism)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둘째, 종교개혁의 발생요인을 교회의 윤리적 타락에서 찾으려는 도덕적 해석(Moral Interpretation)이다. 이 해석은 종교개혁을 중세 로마 가톨릭의 수많은 도덕적 타락을 일소하고 정화해준 운동이라고 평가한다. 셋째,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교리적 해석(Doctrinal Interpretation)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다.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배제할 수 없지만 일차적으로 종교개혁을 잘못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한 성경적 교리를 회복하는 신앙운동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다. 넷째, 사회학적 해석(Sociological Interpretation)이다. 예일대학교 롤란드 베인톤은 16세기 종교개혁의 중요한 요인으로 도시화(urbanization), 상업주의(commercialism), 민족주의(nationa lism), 그리고 제후와 제후의 권력투쟁(power struggle)을 들었다. 다섯째, 막스주의(Marxist Interpretation) 해석이다. 막스주의는 종교개혁을 본질적으로 계급투쟁으로 해석한다. 과거 동독에서는 루터를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몰아내는 상황 속의 인물로 묘사하였다. 동독은 종교개혁 기념 축제를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기념하여 왔다. 이들 다섯 가지 해석 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둘째, 셋째, 넷째 해석이다. 이들 세 가지 해석은 상호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어 종교개혁이 일어난 요인을 어느 하나에 제한시키는 것은 종교개혁의 발단을 축소하거나 자칫 왜곡시킬 소지가 많다. 당시 교리적 부패와 사회적, 윤리적 부패는 상호 깊은 연관성을 지니며 진행되었다.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 교리적인 재발견에서 출발했지만 윤리적 개혁, 사회적 개혁, 국가적 개혁을 수반했다. 루터 자신이 보여주듯 그 자신의 신앙개혁이 루터 개인의 삶의 개혁으로 다시 루터가 속한 공동체와 더 나아가 독일전역과 전 유럽의 신앙개혁, 윤리개혁, 사회개혁으로 이어졌다.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던 1517년 10월 31일에는 종교개혁기운이 교회에 가득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종교개혁을 준비하여 오셨다. 종교개혁 전야의 부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황권의 부패와 부의 축적은 교권의 부패와 연결되었다. 그 시대만큼 종교적인 시대도 없었다. 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당시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신학적 자질은 물론 도덕적인 자질도 보여주지 못했다. 교회의 부패로 교회개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중세 말기 교황권의 부패는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보여주었다. 교리적인 타락은 또한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은 성경을 번역하고 성경과 고전을 연구하면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그들은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한 삶, 수도원 제도, 중세 스콜라신학의 모호성 등 당시의 부패한 종교성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막상 종교개혁이 터지자 에라스무스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둘로 나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을 각오하면서까지 개혁을 외치는 이들과 교회의 일치를 앞세우며 로마 가톨릭에 잔존하려는 이들이 그것이다. 성어거스틴수도원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개혁사상을 강하게 불어넣어준 요한 스타우비츠도 로마 가톨릭에 잔존하였다. 대륙의 종교개혁 루터에 의해서 포문이 열린 개신교 개혁운동은 츠빙글리와 칼빈에게 계승되면서 한층 더 다듬어졌다. 루터는 개혁의 포문만 연 것이 아니라 1520년 독일민족의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기독교인의 자유 등 개혁을 뒷받침하는 일련의 책자들을 출간하여 종교개혁의 사상적 원동력을 제공하였다. 루터는 1522년 9월 독일어로 신약을 완역하여 성경을 사제들의 손에서 민중의 손으로 옮겨주어 성경에 토대를 둔 개혁운동을 가능케 했다. 츠빙글리는 많은 개혁파 신학을 체계화시켰다. 그는 강해설교를 귀중하게 여겼으며, 교육목회를 추진하였고,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급진적인 예전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는 또한 평신도 훈련을 발전시켰으며, 개혁주의 예정론과 성례론의 기초를 놓았다. 재세례파, 루터주의자들과의 논쟁은 츠빙글리의 후기 사역에 방해가 되었다. 로마 가톨릭 주(州)들과의 적대적인 관계로 카펠전쟁(1531)이 발생해 츠빙글리는 그 전쟁에서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성만찬 논쟁은 종교개혁이 직면한 가장 큰 시련이었다. 츠빙글리와의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루터의 종교개혁은 최대의 위기를 만났다. 루터는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성만찬 논쟁에 쏟아 부었고, 성만찬 논쟁으로 인해 개신교 종교개혁은 심각한 분열을 맞고 말았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극심한 대립이 부처와 칼빈에 의하여 어느 정도 중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성만찬 논쟁은 종교개혁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진정한 개혁운동을 방해한 복병이었다. 칼빈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다른 부차적인 문제는 관용해야 한다는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르틴 부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는 개혁자들이 본질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에서는 관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3년 동안 피난민 교회를 맡아 섬기면서 성숙한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그가 1541년 제네바로 돌아와 예배를 개혁하고 학교를 설립하며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도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3년 동안의 훈련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츠빙글리가 1531년에 세상을 떠나고 루터가 154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칼빈은 38살이었다. 1546년 루터가 세상을 떠난 후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깨달은 많은 사람들이 칼빈 주변에 모여들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박해를 피해 제네바를 찾았다. 칼빈은 자신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오는 학생들의 가슴에 개혁사상을 심어주었다.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낙스도 이곳에 머물면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준비했다. 1541년에 출간된 제네바 성경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촉진시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칼빈의 영향을 통하여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에 장로교회와 개혁교회가 형성되었고 영국과 미국에서 청교도운동이 일어났다. 칼빈이 개혁의 불길을 높이 들면서 제네바는 개혁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개혁사개관 #종교개혁이란무엇인가? #종교개혁사 #박용규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