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내 생각이 헝클어지지 않는 이유 (feat. 칸트, 에피메니데스, 타르스키, 피히테)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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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보일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아이는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남들도 생각하고, 자기가 보는대로 남들도 본다고 착각을 하는 겁니다. 즉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은 이 아이의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들의 인지 능력이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인 겁니다. 피아제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환경에 효율적으로 적응하기 위하여 성장을 하면서 특정한 인지 능력이 발달시킵니다. 그는 대략 7세 정도가 되면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게 동감을 할 수 있습니다. 동감을 sympathy라고 하는데요. Sympathy를 영어 사전에는 동정, 연민, 측은지심 등으로 번역을 하죠. 그런데 아담 스미스에게 동감이란, 그런 뜻이 아니라, 어원 그대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A씨가 비지니스 석을 예약을 했는데 항공사의 잘못으로 이코노믹석으로 비행기 좌석에 앉게 되었다고 합시다. 열 받아서 한 잔 먹다보니 취해서 기내에서 난동을 부린 겁니다. 내가 이 기사를 SNS로 읽었다고 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공평하고 냉정한 관찰자를 상상을 합니다. 그리고 이 관찰자가 A씨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빙의를 합니다. 나라면 어쨌을까? 한편으로는 “그 상황에서라면 나라도 난동을 부릴만도 했겠다”라는 판단을 할 수도 있고, “그래도 난동을 부리면 안 되지”라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겠죠. 자. 이러한 판단은 이기심도 아니고, 이타심도 아니고, 동정심도 아니고, 자비심도 아니예요. 그냥 나의 상상 속의 관찰자가 A씨로 빙의를 해서 그의 입장이 되어 본 것일 뿐이예요. 이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동감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동감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