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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주록 #정명공주 #선조 #임진왜란 #광해군 #인목왕후 #계축일기 #영창대군 #서궁 #유폐 #신성군 #천연두 #화정 #한석봉 #인조반정 #인조 #간택 #홍주원 #백서삼폭 #귀희 #옥지 #덕개 #득화 #최명길 #홍만회 #혜경궁_홍씨 #홍국영 #박루시아 #한민 #허정은 #이연희 선조 25년인 1592년에 일본의 침략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전쟁인데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선조가 버린 경복궁은 백성들의 손에 불타 사라졌고 선조는 백성을 버렸다는 멍에를 평생 쓰고 살아야 했던 반면 세자 광해군은 전쟁터를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하는 멋진 모습을 보였습니다.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뒤 선조는 지고, 광해군은 뜨게 되었는데 선조는 광해군을 라이벌로 여겨 세자의 자격을 박탈하고 싶었지만 민심이 광해군의 편이라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광해군이 가진 ‘세자의 자격’은 사실 불완전한 것이었는데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의 아들, 그것도 둘째아들이었습니다. 정비인 의인왕후는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었고 선조는 또 다른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신성군을 세자로 점찍어 두었으나, 신성군은 임진왜란 중에 병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는데 전쟁이라는 국가의 위기 속에 세자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1602년 선조는 인목왕후를 두 번째 정비로 맞았는데 인목왕후가 임신을 하자 광해군과 측근들은 바짝 긴장했습니다. 인목왕후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선조의 적통이라서 당연히 광해군의 자리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 때문인데 광해군에게는 다행하게도 인목왕후는 딸을 낳았으니 그 딸이 바로 정명공주입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새어머니 인목왕후가 임신했을 당시, 유산시키기 위해 도깨비 소동이나 기왓장을 던지는 소동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며 세 살 되던 해에는 귀여운 남동생, 영창대군도 얻어 선조의 유일한 적통 왕자인 동생과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광해군에 의해 어머니와 서궁에 유폐되는 정명공주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 않았는데 공주가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선조가 승하한 다음 날인 1608년 2월 2일, 광해군은 조선의 새 왕이 되었습니다. 정명공주에게는 불행의 시작을 알리는 일이었는데 영창대군이 태어난 다음 해에 선조는 몸져누웠고 1년 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았습니다. 눈을 감기 전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줬는데 세 살배기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선조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고, 영창대군에게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숨을 거뒀는데 이렇게 광해군은 막강한 라이벌 영창대군과 큰 충돌 없이 꿈에도 그리던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역사는 광해군이 어린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어여삐 여겼다고 하는데 특히 자신을 세자의 자리에서 쫓아낼 수도 있는 영창대군에게 더없이 너그러웠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