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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에서는 무명의 근거를 두고 무시무명(無始無明)이라 표현합니다. 곧 시작이 없는 무명이란 뜻인데, 그 무명의 근원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원효 스님은 『대승기신론소』에서 ‘홀연이란 그 시원(始原)을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며, 무명이 일어나는 시간적인 표현이 아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그 근원을 포착할 수 없기에 홀연이란 또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의 사람들이라면 그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 것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근원을 알고 싶어합니다. 우리 중생, 알아야지만 이해할 수 있고, 납득되어야지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서 “홀연히 그리 되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그 누가 이해하고 받아들일까요? 아들한테 너 왜 수학 시험을 망쳤어? “홀연히 그랬습니다” 회사에 지각했는데, “홀연히 눈이 9시에 떠졌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변명이 되지 못합니다. 보통의 경우 홀연은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중생은 앎과 납득을 중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홀연은 참으로 불친절한 설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홀연은 알 수 없음, 즉 미지이기 때문입니다. 알 수 없음 미지 그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중생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은 ‘나’라는 상(相)을 짓고 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결코 이 미지와 불가해의 홀연을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홀연을 대상화할 수도 없고, 특정한 방식을 거쳐 생각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홀연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문제의 근원은 홀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홀연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러한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사실 홀연에는 그 어떤 잘못도 없고 의문의 여지 또한 없습니다.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다가 또한 홀연히 사라지는 것처럼, 홀연은 그 모든 생멸의 자연스런 근거처럼 있습니다. 세상에 우리 인류가 아직 밝히지 못한 홀연의 일들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문제없이 이 세상은 잘 운용되고 있다. 사실 ‘나’라는 존재도 오온(五蘊)이 홀연히 화합되어 연기하는 인연의 존재입니다. 하지만 상(相)을 가지는 중생은 이러한 ‘나’를 두고 강력한 중심으로 상정한다거나 실체를 지닌 존재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홀연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홀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앞서 깨달음은 ‘아는 게 아니다,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홀연히 되는 방법 뿐입니다. 실체없는 나로 돌아가는 것이고 무아의 진리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이 허공처럼 환히 열린다면 홀연과 제대로 만나고 그 모든 인연법들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아의 진리로 돌아가 홀연을 만나는 방법입니다. 이처럼, 무아의 진리나 홀연은 자기 실체화의 관념으로부터 탈피한다거나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연스럽게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체를 가지는 상태로서의 ‘나’는 결코 실체가 없는 진리나 홀연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금강정사 #신심명 #진리 #깨달음 #선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