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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성을 넘어선 집단무의식: 아라야식│대승기신론 강의 (中권 17쪽) (자막을 켜고 보세요) 2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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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성을 넘어선 집단무의식: 아라야식│대승기신론 강의 (中권 17쪽) (자막을 켜고 보세요)

의意와 의식意識에 대해 구분하여 설명한 데 이어서 근본적인 식識이 어떻게 깨침과 연결되는가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무명無明의 훈습에 의해 일어나는 식識이란 근본적인 식識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이를 아라야식이라고 합니다. 한자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고, 산스크리트어 원문은 아라야Alaya식입니다. 저장식貯藏識이라고도 불리는 이 아라야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식識을 분류할 때 보통은 8식識으로 나눕니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만들어내는 식識이 5식識이고, 이 감각기관의 경험에 의해 누적된 내적인 감지를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의식意識이 6식識입니다. 그 다음 마나스식Manas識이 7식識인데, 마나스식은 ‘나’라는 것의 뿌리가 되며, 끌림과 밀침의 기본적인 씨앗이 됩니다. 의식意識인 6식識까지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한 ‘느낌이나 앎’이라면, 이제 마나스식에서는 일종의 기준인 ‘나’가 생겨나 느낌에 대해 좋고 싫은 앎을 일으킵니다. 마나스식 이전에 밀침과 끌림 없이 무조건적으로 저장만 하는 아라야식이 8식識인데, 이 아라야식은 의식적으로는 잘 감지되지 않습니다. 의식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7식識까지입니다. 아라야식은 무의식이나 깊은 심층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심층의식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이 순간 눈을 통해 초당 수백만 비트의 정보가 들어오고 있는데 그중에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것, 다시 말해 7식識 이하가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초당 13~20비트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러분은 내 손을 보고 있습니다. 이때 눈은 손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 180도 전방에서 들어오는 모든 시각적 정보는 망막에 부딪히며 그대로 여러분의 ‘무의식’에 가 닿아 쌓입니다. 바로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들어온 정보들이 끌림과 밀침에 상관없이 모두 저장되는 곳이 아라야식입니다. 이 아라야식은 지금 이 순간에 저장되기도 하지만, 조상으로부터 유전적으로 물려 받은 것, 그리고 40억년의 인류역사가 진행되어 오면서 후손들에게 전달되어 온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라야식을 ‘윤회의 씨앗’이라고 합니다. 윤회의 진정한 의미는, 개인적인 ‘나’가 윤회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의 흔적들이 전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라야식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도 합니다. 7식인 마나스식까지는 좋고 싫음, 끌림과 밀침, 탐진치貪瞋癡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현상의 기준 역할을 하는 중심축인 ‘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에 부딪혀 소리들이 일어나고 거기에 좋고 싫음과 밀침과 끌림이 생겨납니다. 반면, 여래장如來藏인 아라야식에는 ‘나’라는 중심축이 없습니다. 많은 경험의 흔적들이 무작위로 저장은 되어 있지만 탐진치貪瞋癡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탐진치는 그것들이 주객主客으로 나뉘어졌을 때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와 ‘대상’이 나뉘었을 때, 그 ‘나’를 중심으로 해서 ‘좋고 싫은’ 일이 일어나고, 끌리고 밀치는 게 생기고, 무언가를 탐貪하고, 분노(瞋)하는 일이 생기고 어리석음(癡)이 생겨납니다. 수많은 경험들을 때(時)에 따라 잘 사용하면 그만인데, 여기에 중심축이 만들어지면서 그때부터 탐진치貪瞋癡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관성을 넘어가기》(히어나우시스템 刊, 2013)에서도 말했듯이 모든 감정은 기본적으로 어떤 기준 때문에 생겨납니다. 무아無我는 우리 경험의 주인되는 항구불변한 중심축이 없다는 의미이지, 경험을 잘 갈무리해서 사용하도록 하는 텅 빈 중심역할을 하는 그 일시적인 ‘나’라는 느낌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이 없다면 일상을 살아가는 데 완전히 백치와 같아 혼돈만 있을 것입니다. 무명의 훈습에 의해 일어난 아라야식은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언뜻 언뜻 느낌으로 오기는 합니다. 통찰력게임™을 할 때, 어떤 질문이 들어오면 순간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떠오르는 느낌이나 생각, 단어, 이미지들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오는 신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의식적이지 않고, 그것이 떠오른 이유도 모릅니다. 게임에서 어떤 질문을 듣고 아무 이유 없이 동해바다가 떠올라요. 왜 동해 바다를 떠올렸는지 물으면 잘 모릅니다. 의식적이라는 것은 항상 논리적인 줄거리가 있다는 것인데, 심층의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단속적인 느낌들에는 이유나 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마리로 잡고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그제서야어떤 의미와 통찰이 의식화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식적이지 않은 느낌들을 통해 아라야식의 기본에 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라야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생각과 감정 위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밑바탕에 있는 감지感知™ (즉, 감각感覺™으로 내려가기 직전의 미묘한 느낌들)를 의식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올라오는 순간순간의 느낌들을 면밀하게 잡지 못한다면 이 미묘한 느낌들은 결코 의식적이 되지 못합니다.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中권 17~20쪽 ▶ 이 내용은 ‘깨어있기-의식의 대해부’ 워크숍의 후속모임인 오인회(悟因會)에서 월인 님이 강의한 2012년 대승기신론 강의의 일부입니다. ▶ 이 강의 전체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있습니다: 《대승, 현상과 본질을 뛰어넘다》 상,중,하권 ------------------------------------------------ ▶ 출처: 대승기신론 강의 27강 ▶ 강의: 월인(越因) ------------------------------------------------ #깨어있기 #대승기신론 #의식탐구 #아라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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