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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서른한 번째 이야기,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천수답의 새벽묵상) 2 года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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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서른한 번째 이야기,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천수답의 새벽묵상)

더 깊은 성경연구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쉽고 재미있는 성경연구 https://www.vop.or.kr/ 이백서른한 번째 이야기,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 열왕기상 18장과 19장, 두 장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모습은 급격한 대조를 이룬다. 의기충천한 18장과는 달리 19장의 선지자는 차라리 죽는 게 났겠다고 말하며 깊은 우울모드에 돌입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영적인 사람들도 이런 감정적 위기와 변화를 겪는다. 그리스도인들도 어떠한 시련과 위기가 와도 능히 이겨 낼 것 같지만 때로는 작은 소문 하나에도 패배자처럼 마음의 혼란을 겪으면서 나자빠질 수 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엘리야를 이렇게 급격한 감정의 변화와 패배 의식으로 몰고 간 것일까? (왕상 19: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왕상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기근에 대한 책임을 엘리야에게 돌리며 그를 언제든지 잡아 죽이려는 아합과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 백성들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던 엘리야가 살겠다고 줄행랑을 치고 결국에 가서는 나 죽겠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생각에까지 이른 것은 이세벨의 공갈 협박 때문이었다. 서슬 시퍼런 아합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그가 아니었던가? 갈멜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왕궁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차를 앞서서 달리던 엘리야가 한 여인의 날카로운 협박에 겁이 나서 줄행랑을 치고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은 애처롭기 짝이 없다. 이렇게 신속하게 그의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이 형편을 보고”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너냐?”라는 아합의 호령 앞에서도 내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라고 맞서서 소리치던 엘리야는 어디에 가고 겁박을 받자 도망가 버린 선지자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겪은 것이다. 먼저는 그가 하나님을 보았다면 이제는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때 두려움이 없어진다. 다윗은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고 노래했다. 하나님을 볼 때는 두려움이 없어 지지만 선지자는 그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형편을 보았다. 위기는 가중되고 큰 어려움이 닥친 듯이 보였다. 사단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과장해서 더 불행하고, 더 두렵게 느끼도록 부채질한다. 마치 자신이 더 이상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서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당황하여 주변에 큰 도움의 손길이 있는데도 눈은 어두워지고 위기만 보게 만든다. 엘리야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모든 사람의 경험 가운데는 통렬한 실망과 철저한 낙담의 때 곧 슬픈 운명에 처하여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에 태어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날들, 고통이 영혼을 괴롭혀 마침내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것처럼 보이는 날들이 이르러 온다. 이런 때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을 잃어버리고 의심의 노예가 되고 불신의 속박에 매인다. 만일 우리가 이와 같은 때에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다면 그 같은 상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의 발을 영원한 산보다 더 튼튼한 기초 위에 세우려고 노력하는 천사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새 신앙과 새 생애가 싹트게 될 것이다.”(선지, 162) 결국 누구를 보느냐의 문제다.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영원한 인도자요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우리의 감정이 변한다. 위기의 때에 우리가 바라볼 것은 자신의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태산처럼 우뚝 서서 우리를 지키신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시선이 오직 주만 바라보게 하소서. 주만 보고 자기를 보지 않게 하셔서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소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한순간 시선을 놓치면 밀려드는 두려움에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하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두려움을 물리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팟캐스트 방송)-- http://www.podbbang.com/ch/10726?e=24... --(Link-2)-- http://file.ssenhosting.com/data1/c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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