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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은 1905년 9월 27일 지금은 충청남도 금산군 군북면 외부리 부농가에서 삼백석꾼인 이면배의 4남 2녀중 넷째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초 군북면장과 금산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을 지내 송덕비를 세워 지금도 금산과 대전간 도로변에 서 있다 1925년 박헌영등과 조선공산당 차얼에 참여하고 1926년 6.10일 만세 운동에는 학생신분으로 주동자 역할을 한다 1927년 보성전문학교 현. 고려대 법과에 들어간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위원등 다양한 활동을 한다 2차 대전 말 일제의 발악으로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 전향이 속출하고 수사망을 피해 덕유산으로 도피 은거를 하면서 대전에서 지하 활동을 한다 1946년 12월 남조선로동당으로 개편 중앙위원. 연락부장등 간부부장을 맡았으나 미군정의 국가보안법제정으로 불법화되어 박헌영과 함께 월북한다 *미군정의 힘을 입고 있는 이승만과 순수 민족 통일을 꿈꾸 김구 *소련의 힘을 입고 있는 김일성과 순수 공산당을 꿈꾸는 박헌영 외세의 등을 업고 있는 김일성을 극도로 싫어 했으며 공산당의 정통성은 남조선로동당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리승엽과 박헌영은 김일성과 타협점을 찿았으나 이현상은 외압에 의한 굴복이라 간주한다 모스크바 유학을 가려고 준비 하던 중 파벌싸움으로 김일성파와 싸우다 유학은 취소되고 남한으로 쫓겨나 지리산일대등 산속에 활동하는 조직들을 로동당원을 점검하고 독려하던 중 남로당원의 여순사건 발생으로 전체 지휘를 맡게 된다 6.25전쟁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하여 미군부대 통신기지와 미군 200여명을 사살 하고 미군 탱크를 상대로 전투를 치뤄 남한 빨치산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토벌대의 강한 압박과 소멸되는 병력을 데리고 북한으로 월북중 용인까지 밀고 내려온 중공군의 소식과 강원도 평창에서 새로운 지령을 받게 되고 신분을 숨기거나 숨어 지내 던 빨치산 1,000여명을 모아 다시 남하 하던 중 충주를 점령 한다 다시 덕유산 송치골로 이동하여 남한 6도당 회의를 하며 지휘권을 갖게 되는데 지금부터 정확한 명칭은 “남부군“이란 용어를 쓰게 된다 지리산으로 입산하기 위해 황매산으로 내려 온 후 덕산지서를 공략하는데 쉽게 점령하지 못하고 거림골로 숨어 덜었으나 계속되는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산내면 달궁에 주둔하게 된다 체육대회를 할 만큼 많은 수의 남부군이 집결해 있었다고 한다 현재 길옆 달궁식당이 최종 방어선이 되어 수많은 피를 흘린 장소라고 한다 끝도 없는 공격에 대성골로 주둔지를 이동 꾸준히 빨치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때쯤 북한에서는 1953년 8월 6일자로 이현상의 윗선이였던 이승엽을 포함한 정적 남로당파 15명을 일제히 숙청하고1953년 9월6일 김일성 절대 지지파인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에 의해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당원으로강등 무장 해제와 반감금 상태가 되고 남부군 사령부 요원은 각 도당으로 분대 되고 만다 1953년 9월 6일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 2명인 김은석과 김진영이 체포된다 이현상이 숙청된 것에 불만을 품고 제5지구당 해체되고 홀로 감금되어 경남도당으로 이송 대기중이라는 정보를 제공한다 9월13일 작전명령 9호 발동으로 이현상 체포작전에 시작된다 군경은 더 이상 합동작전없이 남부경비사령부와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로 나뉘어 경쟁하듯 작전을 펼쳤다 전원 특진과 큰 상금이 있었다 경찰은 정보를 숨기고 군부대가 빗점골에서 철수할 때 까지 작전을 연기한다 이현상의 호위병을 포함한 22명이 된 2연대 수색대는 17일 23시부터 매복 다음날 18일 11시경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 3명을 포착 1명을 사살하고 2명은 도주하였다 2명중 1명이 이현상이였고 18일 빗점골에서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군과 경찰이 서로의 공적 싸움으로 말이 많았으나 경찰편을 덜어 주게 된다 부검결과는 등뒷쪽 근거리에서 사살된 것으로 판명 호송하던 경호원이 다른 지령을 받고 이현상을 사살한게 아닌가 의문점만 남았다 너무도 치를 떨었던 이승만은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서울로 이송하고 창경원에 바지만 입혀 20일간 전시 하였다고 한다 고향 금산의 가족들은 대부분 월북하였고 유일하게 남아 있던 숙부는 집안을 풍비박산냈다며 인수를 거부 하게 되고 결국 제2연대장 차일혁 총경이 53년10월8일 연대본부 옆 섬진강변 송림에서 화장한 후 강물에 뿌려줬다 공산주의 이상을 꿈꿔던 이현상은 민간인 학살등의 행위는 없었다고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 일기에도 적혀 있었으며 도당에서는 군경 포로를 전부 사살하는데 남부군에서는 포로를 돌려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할 만큼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