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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기시대 혹은 후기시대 앗시리아가 점령한 시대부터 보통 말기시대 혹은 후기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의 이집트는 통일이 되어 있지만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대처럼 이집트가 지역 전체에 대해서 어떤 패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힘이 약해져 가는 시기입니다. 망하기까지 거의 1000년이 걸리지만 점점 힘이 떨어져가는 시기입니다. 앗시리아는 이집트를 직접 통치한 것이 아니라, 토착세력한테 정권을 주고, 즉 괴뢰정권을 세웁니다. 26왕조인데, 26왕조가 후에 앗시리아로부터 독립을 합니다. 1차 아케메네스 점령기 기원전 6세기에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이 이집트를 정벌합니다. 이집트 제27왕조 전체가 아케메네스의 지배를 받지만 페투바스티스 3세 대에 봉기를 일으켜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이후 제30왕조까지 이집트는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기원전 343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의 침공에서 넥타네보 2세가 패전하여 다시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2차 아케메네스 점령기 패전한 이집트 제31왕조는 기원전 332년까지 페르시아의 속주가 됩니다. 페르시아인이 파라오가 되었죠. 실제로 2017년에는 미라 90구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고대에서 중세까지 근동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의 유전체와 상당히 유사하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헬레니즘 통치기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으로 확대된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 이집트를 지배하던 시기입니다. 페르시아와 전쟁하고 동방 원정을 떠나면서 가장 먼저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쪽으로 나갑니다. 332년에 이집트로 들어와서 페르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그러고는 알렉산드로스는 제국을 완성하고 금방 죽고 그의 제국이 4개로 쪼개지죠. 그때 이집트를 장악한 인물이 알렉산드로스의 친구이자 동료이자 부하인 프톨레마이오스이고 그가 이집트에 와서 통치자가 되니까 이제 파라오가 된 셈이죠. 이후로 약 300년 정도 후손들이 이집트를 통치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라고 합니다. 동쪽으로는 시리아 남부에서 서쪽으로는 키레네, 남쪽으로는 누비아에 이르기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가진 헬레니즘의 속주였습니다. 이 시기의 나일강 삼각주 북서단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였습니다. 이집트 원주민들의 수월한 통치를 위해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통치자들은 파라오를 승계했습니다. 실제로 프톨레마이오스 후기까지 이집트인들은 다른 지역들과는 다르게 헬레니즘 문명의 영향 속에서도 전통적인 이집트식 복식과 종교 및 삶의 방식을 그대로 영위했습니다. 지배자의 출신만 바뀌었을 뿐, 국민들의 삶은 비슷한 것이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 출신의 지배자가 아닌 것에 대한 거부감이 특히 강한데, 사실 세계 곳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배자들의 출신이 바뀌는 건 아주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중국도 마찬가지죠. 우리나라와 일본이 잘 안바뀌죠. 일본은 아예 바뀌지 않았고, 우리나라도 일본이 36년간 지배했던 시기를 빼면 여하간에 지배는 한반도 출신이 했으니까요. (물론 고대국가 이전의 한반도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도 많지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는 클레오파트라로 잘 알려진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입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으로 뛰어난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집트를 다시 한번 부흥시키려고 기원전 50년 경에 파라오에 오르는데, 그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최강자로 자리매김하던 로마와 파워게임을 펼칩니다 그녀는 여러 권력자들과 여러 관계를 통해서 이집트를 부흥시키고자 여러 시도를 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악티움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망명자였던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가 패배를 하면서 클레오파트라도 죽고 이집트도 로마 제국에 속주로 편입이 됩니다. 이 시점이 기원전 30년이며, 공식적으로 이집트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이집트의 독립된 왕조는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헬레니즘 문화는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 이후까지 계속 남아있습니다. 물론 이집트 전통 문화도 계속 유지됩니다. 대표적인 예로, 로마 황제들이 파라오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장면들을 볼 수 있죠. 수천년 동안 이어진 지금봐도 빼어난 문화가 계속 살아남는 힘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문화적 재생산도 끝이 나는 시점이 찾아오는데, 그 시점은 4세기 말입니다. 세계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도 기독교는 공인되어 있었지만 이제 국교로 만든다는 것은 로마제국에서 유일하게 신앙이 될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소리거든요. 그래서 당시 로마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가 391년에 이집트를 침략합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의례를 금지합니다. 이 금지는 이집트의 역사상 특별한 의미가 있는데, 그동안 수천년동안 계속해서 운영되던 이집트의 모든 신전들이 더 이상 의례를 올릴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집트에서의 신전은 단순히 종교적인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행정적으로 문화적으로 중심 공간이었는데, 이 신전이 더 이상 운영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집트문화는 다시 재생산할 수 있는 원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그러다 보니까 5세기 전반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고대 이집트문화가 잘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문화적으로 이시점 4세기말~5세기 초반이 이집트 문명의 완벽한 종말의 시기입니다. 로마 통치기 로마 속주 이집트 지역은 로마의 곡창지대가 되어 제국 전체에 곡물, 아마, 파피루스, 유리, 기타 공예품들을 공급합니다. 기원전 3500년 이전부터 나일강유역의 생산량은 저 거대한 피라미드를 조성할 만큼의 엄청난 경제력을 제공해 주었죠.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의 지배 하에서도 교역의 중심지로 계속 남아있으며, 일부 기록에 의하면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고도 전해집니다. 이집트는 인도나 에티오피아와 국제적 교역의 중개지도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 부분에 있어서도 제국을 이끌어나갔죠.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 히파티아, 헤론은 점성술, 수학, 공학 등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로마에 비견되는 위상을 차지했죠. 아이깁투스 교구 예수에서 시작된 초기 기독교의 복음은 이집트에도 전파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복음사가 마르코가 이집트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티오크는 수십년만에 기독교의 중심지로 성장합니다. 신약성경이 이집트어로 번역된 것도 이 때였습니다. 고대 후기 또는 비잔틴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인 디오클레티아누스 통치기에 매우 많은 수의 기독교인들이 이집트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서기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콥트 정교회가 설립되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사산제국 통치기 이집트는 사산 제국에 의해 리비아의 일부로서 619년부터 629년까지 10년간 지배를 받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라클리오스와 연대한 샤흐르바라즈가 봉기를 일으킬 때 이집트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슬람 초기 10여년간의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통치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다시 이집트를 회복하나, 639년에서 642년에 아랍 이슬람 제국에 의해 점령됩니다. 이집트에 식량과 사치품을 의존하고 있던 비잔티움 제국은 이집트의 함락 이후 급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이집트의 나일강유역의 생산량은 세계사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나 봅니다. 아랍인들은 이집트에 수니파를 가져오고, 수니파는 이집트에 정착해 있던 기독교 전승, 이집트 전통 종교관, 실용주의로부터 수피파의 형성에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특성들은 콥트 교회에도 일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중세시대 독립국의 지위 이슬람 칼리파국에 의해 임명된 이집트의 통치자들은 카이로를 수도로 삼았는데, 이후 파티마 칼리파국에서도 이러한 관습은 이어집니다. 쿠르드족의 아이유브 술탄국의 멸망 이후 서기 1250년부터 맘루크, 즉 튀르크족과 체르케스인의 통치를 받습니다. 13세기 말엽에는 홍해, 인도, 말레이 제도, 동인도 제도와도 교역을 시작합니다. 그리스와 콥트계 언어와 문화는 아랍 문화의 융성함 속에서 점차 사라져갑니다. 14세기 중반에는 흑사병이 이집트 인구의 40%를 앗아갑니다.(40퍼센트라니, 엄청나네요) 게다가 포르투갈이 다우 전투에서 맘루크 제국을 압도하면서 인도양의 주도권을 가져옵니다. 이로써 쇠약해진 맘루크 제국은 1517년에 오스만-맘루크 전쟁으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게 이집트의 통치권을 빼앗깁니다. 오스만 통치기 15세기 이후 오스만은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이집트의 체계를 붕괴시킵니다. 특히 이집트는 오스만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 사회와 경제 제도를 희생하면서까지 방위군을 소집합니다. 이처럼 약화된 경제는 흑사병과 어우러져 국력을 폭락시키는데 큰 원인이 됩니다. 1687년부터 1731년까지 6번의 기근을 겪은데 이어 1784년의 기근은 단번에 전체 인구의 1/6을 앗아갑니다. 이후,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은 1798년에 이집트-시리아 원정을 시행합니다. 이때 로제타석이 발견되면서 이집트학이 출범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나폴레옹과 프랑스 근동군은 결과적으로는 나일 해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이집트의 지배력을 잃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