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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중 하나인 빈 교외에 위치한 인처스도르프에서 아버지 루돌프 도너와 어머니 프란치스카 게르하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빈 상업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가서 영어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1920년에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였던 헬무트 뵈링과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였다. 이후 1933년 2월에 스위스 여행 중 제네바에서 이승만을 만나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했다. 이승만과 함께 미국에서 살다가 광복 후 대한민국으로 왔고, 남편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초대 대통령 배우자가 되었다. 이 때 한국에서는 대통령 배우자가 외국인이라고 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오스트레일리아와 혼동해서 그녀를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 전투기 중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 F-80 슈팅스타, 글로스터 미티어 등을 통틀어 호주기라고들 불렀는데, 이를 혼동하여 대통령 배우자의 친정 국가에서 지원 보내줬다면서 고마워한 한국인들도 있었다. 대통령 배우자라는 위치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관련된 자질구레한 일을 직접 하며 수발을 드는 등 매우 헌신적인 아내였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와 속기 및 타자에 능숙하여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에는 동지로서, 건국 후엔 대한민국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비서로서 외교 업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6.25 전쟁 기간에는 3개국 언어로 비밀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수많은 편지로 전쟁의 참사를 알려 국제 사회의 동정적 여론을 이끌어냈으며, 외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통역사로 곳곳을 누비며 큰 역할을 해냈다. 또한 나라의 궁핍한 살림을 돕기 위해 유럽의 은행가들로부터 대한민국이 경제원조를 받도록 다리를 놓는 역할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고령으로 접어들자 남편의 신변을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이승만의 심기를 거스를만한 모든 인물과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 내조로 이승만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下野)한 후, 이승만을 따라 하와이로 갔고, 그의 임종을 지켰다. 이승만 사망 이후에는 고향 오스트리아로 잠시 돌아갔다가 1970년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여생을 보냈다.[15] 한국에서는 이화장에서 그녀의 양자인 이인수 부부와 함께 거주했다. 정동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마다 이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면서 조용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를 방문하기도 하는 등 한국 최초 퍼스트 레이디로서 국가 원로로 예우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관속에 태극기와 성경책 그리고 남북통일이라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넣고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91세를 일기로 이화장의 집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으며, 1992년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합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