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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학파의 영향과 의의 노사 기정진선생으로 비롯된 노사학파 학맥의 1백 50여 년에 걸친 계승은 19세기 중반까지 기호학계의 주변부에 위치했던 호남의 성리학적 위상을 강화하는 기반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호남을 중심으로 서부 경남에 걸쳐 8천여 명을 상회하는 문인들이 지속적으로 배출되고, 이들의 활동이 중단 없이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는 것은 근현대 한국 유학의 중심지 중 한 곳이 호남을 비롯한 서부 경남임을 확인하는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조선이 사라지고, 110년이 지난 21세기를 생각해보자. 인적, 물적, 지적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인적 차원에서 삼전 사전을 통틀어 8,000여 명을 헤아리던 문인집단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노사학파의 기본적인 관념적 기준은 노사가 세상을 떠나기 이전의 조선 이미지에 맺혀 있다. 그것은 1879년 이전 체제를 뜻한다. 그러나 1905년과 1910년 조선의 망국은 명확한 물리적 실재로서 대중들의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노사학파는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 갑오농민혁명, 명성황후 시해사건 및 을사늑약, 그리고 경술국치… 활동은 이어졌지만, 변하지 않는 이념적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결코 노사학파의 이념적 기초가 만민평등과 자유를 주장하는 유럽 근세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사학파의 이념적 기초가 율곡의 성리학이라는 데서 이미 예견된 것이다. 율곡과 퇴계는 1589 혹은 1592년 이전 조선 체제를 기반으로 한다. 노사의 이념적 안테나는 바로 그 이상적 시대, 임진왜란 발발 이전의 조선을 이념화한 성리학적 대동단결의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1905년 이후의 상황은 이러한 노사학파 후학들의 이념적 목표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파국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송대 성리학은 그 이전의 유학적 전통의 고답적 성격에 저항했다. 특히, 그들이 불교와 도가 사상에 저항하는 안티 이데올로기로서 기존 유학의 전통이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공박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그 이전 시대가 불교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공격했다. 기정진의 시대 서구의 침탈이 이념적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율곡의 성리학이 이에 대한 대응 이데올로기로서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제 일제 식민지를 겪고, 6.25를 지나쳐, 군부 독재를 거쳐 21세기에 도달한 한국인들이 있다. 우리는 노사 기정진으로부터 무엇을 계승해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끊어내야 하는가? 이 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노사가 자신의 사상적 토양인 기호학파의 근원에 대해 무엇을 말했는가 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퇴계는 자신의 토양을 오른쪽으로 과격하게 더 방향을 틀었다. 주희가 마지못해 인정했던 리약기강(理弱氣强)을 리강기약(理强氣弱)의 이상으로 묘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노사도 율곡의 성리학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리무위(理無爲)가 19세기의 현실에서 기유위(氣有爲)를 통제할 수 있는 성리학적 차원으로 승화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어떠한가? 인적 차원에서 노사학파의 사전제자까지 이르는 8,000여 명의 그림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물적 차원에서 노사학파가 남긴 물리적 유산들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지적 차원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현대 한국의 이념적 대립에 대한 노사학파의 대안은 무엇인가? 우리는 비록 형식과 내용은 다르지만 여전히 비슷한 농도의 문제에 마주치고 있다. 노사를 경유하든, 간재를 경유하든 질문은 늘 똑같다.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참조해야 과거란 도대체 무엇인가? 노사학파의 가르침은 과연 현대의 우리에게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결국, 영원히 현재적인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의 질문과 그 대답들이다. 노사가 옳고 다른 어떤 성리학자가 틀렸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19세기에 20세기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은 노사와 화서, 한주와 면암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던 성리학적 사유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노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성리학적 사유를 추동했던 기원에 대해 수행했던 철학적 작업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를 사유하는 것이 남는다. 자신의 기원을 돌이켜 그 본원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원적 사유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것이 남는다. 모름지기 철학이 고래로 그래야했던 것처럼 자신을 낳았던 사유의 근원적 문제점을 ‘기자이(機自爾) 비유사지(非有使之)’의 성리학적 타당성을 물었던 노사의 질문처럼,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물어야 할 필요성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