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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변란사 #임진왜란 #이탕개의난 #여진족 #경원진 #김수 #양사의 #이제신 #신립 #이순신 #종성진 #호정 조선변란사 임진왜란 직전 최대 규모의 전란 이탕개의 난 (尼蕩介의 亂) 우을기내 율보리 이탕개의 난 (尼蕩介의 亂)은 조선 선조 16년인 1583년 1월 ~ 7월에 걸처 함경도 북부의 6진에서 벌어진 여진족의 변란을 일컫습니다. 조선전기 안보전략은 이른바 ‘북로남왜’, 즉 북방의 여진과 남쪽의 왜구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금나라가 멸망한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분산되어 살고 있던 여진족들은 주로 유목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겨울이 되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수시로 도강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아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세종때는 함경도 군사외에도 남방의 병력까지 동원해 대규모 토벌을 가해 제압하기도 하고 또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고 관직을 수여하여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는 등 ‘채찍과 당근 전략’을 병행했습니다. 남만주에 넓게 분포하여 살던 여진족들은 부락단위로 분열되어 일부는 조선에 우호적이면서 귀화하여 충성을 하는 번호도 있고 여전히 적대적으로 행동하는 부락도 있었습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이들 ‘번호’가 국방전략상 상당히 중요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여진족이 명나라와 교역을 하면서 여진의 침략이 감소하자 조정도 이들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집니다. 또한 이들을 관리하고 위무해야할 책임이 있는 현지 수령이나 지휘관들 역시 인식 부족으로 오히려 이들에게 난폭하게 굴어 불필요한 반감을 조장하였고 이로 인해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탕개의 난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에 대한 조선의 지원과 관심 부족에 대한 불만, 식량난, 수령들의 횡포에 대한 반감, 여진족 세력 다툼 등으로 발발하게 됩니다. 이 당시 최대 3만명에 달하는 여진족 무장 세력이 조선을 침공해 왔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직면한 최대 규모의 전란이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문제로 거론된 여러 방위 체제를 재검토해서 진관 체제에서 제승방략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