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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7강에서는 본 강의 주제에서 살짝 벗어나, 〈구약성경의 이모저모〉 라는 주제로 조금 쉽게, 구약성경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모르셨을 것 같은 내용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특히 이단을 한 명 말씀드리려고 해요. 때로 우리는 고대의 이단에서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역사란, 때로 비슷한 오류가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가 이미 인류가 겪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과거에 빠졌던 함정에 또 빠지는 것이죠. 성경 필사 - 몸으로 익히는 성경 유다인들은 지금도 3천년전, 4천년전의 말로 성경을 외운다. 집에서부터 성경을 외운다. 어머니에게, 아버지에게 배우는 것이다. 수천년 전 조상의이야기를 외우는 것이다. 그런 힘이 유다인의 힘의 원천이다. 몸과 머리로 외워버린 것은 오래 간다. 나라를 잃고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는다. 누구도 지울 수 없다. 그 민족, 그 사람을 깡그리 다 죽여 버리기 전에는, 그래서 모국어가 중요하다. 모국어로 외워버리면, 모국어도 잊지 않고, 모국어로 외운 그 내용도 잊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성경필사는 참 좋은 방법이다. 우선, 몸으로 성경을 경험한다는 면에서 좋다. 성경 본문을 베끼며, 가장 완벽한 책을 한 자 한 자 경험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또 성경필사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성경이 한 부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것도 손으로 쓴 정성스런 성경이. 그래서 그냥 ‘성경 필사’라고 하지 말고, 정성들여 사본을 하나 만든다고 하면 어떨까? 마르키온주의 저는 여러분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기 위해 고대의 이단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마르키온은 약 기원후 85년에 소아시아의 시노페(Sinope)에서 태어나서 약 160년에 죽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다인의 성경’ 연구로 이름을 얻어, 그에게 구약성경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 왔습니다. 곧, 처음에 그는 그저 열심하고 명성 있는 구약성경 학자였을 뿐입니다. 그 당시는 ‘구약성경’을 ‘유다인의 성경’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신약성경은 무엇이라고 불렀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성경’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는 구약 46권, 신약 27권, 총 73권으로 된 성경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교회에서는 이렇게 성경 목록이 확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외경으로 분류한 책들도 성경처럼 읽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키온은 ‘정경의 목록’을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책이 성경이고 어느 책이 성경이 아닌지 확실히 기준을 갖고 갈라서 목록을 만들어야 신자들이 헷갈리지 않겠다 하고 생각한 것이죠. 이 생각을 한 것은 그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비록 이단일지라도 ‘정경’(正經canon)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공로는 인정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어떤 책이 정경이 되기 위해서,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을 경전의 ‘자기 완전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말은, 그 책의 본문 자체로 완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기준에 따라 자의적으로 책들을 분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그는 ‘유다인의 성경’, 곧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으니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는 나아가 구약 성경의 ‘야훼 하느님’과 신약성경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 곧 ‘예수님의 하느님’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두 신이 다른 신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그는 구약의 하느님은 전쟁의 신, 율법의 신, 유다인의 신이요, 예수님의 하느님은 평화의 신, 말씀의 신, 만인의 보편적인 신이라고 신약과 구약을 ‘대립시켜’ 보았습니다. 이 점이야 말로 명백한 오류요,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점입니다. 신약성경과 구약성경은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둘이 하나요, 서로 완벽히 조화되는 관계입니다. 당시 마르키온은 왜 이렇게 대립되어 보이는가 하는 문제를 고심하다가, 결국 문제는 ‘유다인의 성경’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유다인의 성경’, 곧 구약성경을 뺀, 무척 얄팍한 성경 목록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마르키온 성경’이라고 합니다. 곧, 그의 두 번째 오류는 그가 자의적으로 성경의 책 가운데 일부를 빼서 자신만의 성경 목록을 만든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전통에서 벗어나 스스로 이렇게 성경의 목록을 편집하는 태도는 분명한 잘못입니다. 결국 그는 가톨릭 교회에서 설 자리를 잃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세웠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갈라져 나갈 당시, 144개나 되는 공동체가 그의 분파에 참여할 정도로 대규모의 이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분열되어 새로운 종교를 세운 것도 그의 큰 오류입니다. 그의 교회는 이집트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번성했습니다. 하지만 3세기부터 잦아들기 시작하여 6세기에는 찾아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가톨릭 교회의 신학자들은 성경을 이해할 때 있어, ‘마르키온 주의’(Marcionism)의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마르키온 주의란, 신약과 구약을 이렇게 대립 관계로 이해하는 경향입니다. 이런 오류는 훗날 다양한 이단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키온주의는 현대에도 은연중 널리 퍼져 있습니다. 독일의 저명한 구약학자 에리히 쳉어(Erich Zenger) 신부님의 책에서는 오늘날의 ‘잠재적 마르키온주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곧, 현대인도 자칫 잘못하면 마르키온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쳉어 신부님은 ‘잠재적 마르키온주의’가 현대 세계에서 대략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데, 첫째는 ‘대체 모델’입니다. 한마디로 신약이 구약을 대체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체된 것은 대개 쓸모없게 마련이죠. 자동차가 나와서 마차를 대체했습니다. 이제 마차는 느리고 짐도 많이 싣지 못하는 것 이므로 쓰지 않게 되죠. 그러므로 심한 경우, 신약만 읽으면 되고 구약은 나중에 읽어도 돼, 또는 안읽어도 상관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에서 그런 말을 하는 동료 신자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농담조라도 이런 말은 피해야 하겠지요. 둘째는 ‘상대화 모델’입니다. 구약성경을 상대화시키는 것이죠. 곧 신약성경만이 절대적이고 구약성경은 상대적인 것, 곧 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을 준비하는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책이고, 신약성경의 예수님이 구약성경의 약속을 실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약성경이 덜 중요한 책은 절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백성을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집트 탈출 사건’은 주님의 해방이 실현된 사건으로서, 두고두고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 모세는 ‘주님께서 이집트에서 끌고 나와주신 분임을 잊지 말라’고 거듭해서 권고합니다. 예언자들은 ‘죄를 뉘우치고 참된 해방의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라’고 외칩니다. 유배중의 백성은 해방의 하느님께서 한 번 더 우리를 이끌어 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참된 해방이 실현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주님의 이집트 해방 사건이 덜 중요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신명기의 권고, 곧 해방의 하느님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섬겨라하는 말씀이 상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오셨더라도, 하느님께서 구약시대에 우리 인간에게 해 주신 일은 절대 상대화되거나 덜 중요해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는 ‘선별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이런 생각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구세사는 마치 씨앗이 발아하여 점점 자라나듯 점차 성장하여 결국 신약성경의 예수님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의 일부 내용만 신약성경으로 흡수되고, 일부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약속은 얼핏보면 비체계적이고 난해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약성경에 흡수된 내용만 ‘선별해서’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오류입니다. 신약성경에 반영되지 않은 구약성경의 내용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종합하신 것이 불완전해지지 않습니까? 비록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신약성경에 포함되지 못하고 누락된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설혹 인간적인 눈으로 그렇게 보이는 내용조차 역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계시임을 믿어야 합니다. 구약성경의 어느 구절이라도 깊이 성찰하고 깨닫는 자에게는 참 구원의 빛을 뿌리기 때문입니다. 얼핏 신약성경과 무관해 보인다고 해서 버려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성찰해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그 내용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주원준박사 #구약성경 #구약성경과신들 #가톨릭평화방송 #cpbc ========================================= 방송선교ARS후원 : 060-706-1004 (한 통화 5,000원) 060-706-4004 (한 통화 10,000원) 후원문의 : 1588-2597 https://mrmweb.hsit.co.kr/v2/Member/M... 매일미사 지향 신청 : 02-2270-2640, 02-2270-2650 카카오톡 플러스친구 : cpbc TV ========================================= cpbc TV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세요. 가톨릭콘텐츠의 모든 것! cpbc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