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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29] ‘죄짐을 지기가’ Ⅰ. 하나님의 속성, 죄의 속성 1. 교훈 vs 복음 기독교는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종교가 아니고 성경은 인간이 읽고 자신이 실천하고 적용할 교훈을 깨달아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자료가 아닙니다. 사람이 교훈을 얻는 것은 ‘앞으로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삶의 수단과 방법으로 삼아 실천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패턴은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아주 다양한 자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전하는 내용을 교훈 또는 좋은 말, 또는 덕담이라고 하지 않고 복음,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교훈이나 덕담은 ‘소식’이 아니라 유용한 가르침이거나, 보탬이 될 수 있는 안내 또는 가이드 또는 지침 정도일뿐 ‘기쁜 소식’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소식은 ‘누군가가 일을 해서, 수고를 해서 이미 결과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 소식이 ‘기쁜 소식’인 이유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수고를 해서 결과를 만들어 냈는데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나에게 유익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는 교훈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속성 마20장의 비유는 ‘포도원 품꾼 비유’가 아니라 ‘천국비유, 포도원 주인비유’입니다. 주인이 오후 5시에 쓰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는 일꾼까지 고용합니다. 쓸모없는 사람, 쓸 재주도 없고, 기술도 없고, 가치도 없고, 필요도 없는 사람들을 이 시간에 고용하고 일을 마친 후 품삯을 주는데 가장 늦게 온 사람부터 지급을 해 주었습니다. 본문이 강조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존중해 주시고, 배려해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품어주시고,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진 자로서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상황을 살펴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인간을 기준으로 할 때 새벽에,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 5시에 나온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할 때에는 모든 인간이 똑같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사람이 없고, 하나님이 도움을 받아야할 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고용해서 이루어내야 할 별도의 목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방식이어야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3. 죄인의 속성 품꾼 중에 먼저 온 자가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원래 약속된 만큼만 받으니까 집 주인을 원망합니다. 늦게 온 사람 때문에 일할 기회를 빼앗긴 것이 없고, 받아야 할 품삯을 나누어야 해서 손해를 본 것이 없습니다. 본인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은 없고, 상대이든 주인이든 자기에게 피해를 준 것이 없지만 불만족한 마음이 들었고, 원망을 하였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일찍 고용이 되어서 기쁘고, 정한 시간만큼 일하고 정한 금액만큼 품삯을 받아서 기뻐해야 하는데 괜히, 뜬금없이 화가 나고 전혀 기쁘지 않은 것이 죄의 태도이고 죄의 방식이고 죄의 결과입니다. 아마도 다음 날에는 일찍 나오는 대신 느즈막히 나와 반나절 정도만 일하고 하루 품삯을 받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기보다는 도리어 상대를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죄인의 심리이고, 죄의 속성, 죄의 마음, 죄의 방식으로는 인간이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4. 누가 크니이까 창4장에서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과 원리와 방식을 보여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등장 인물을 통해 죄의 속성, 죄의 성품, 죄의 마음과 원리와 방식을 보여줍니다. 가인과 아벨이 어떤 것을 제물로 드렸는지, 그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두 사람을 비교하고, 구분하고, 누가 옳았는지, 누가 맞았는지, 누가 착했는지를 구별하려 하고 하나님의 반응에 근거해서 아벨이 신실했다는 결론을 맺는 것은 결코 기독교의 패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크니이까’로 다툴 때(마18장)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큰 자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수단과 방법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애초에 ‘누가 크니이까’의 다툼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Ⅱ. 죄짐을 지기가 1. 하나님의 반응 아벨은 의인이었고 가인은 죄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둘 다 죄인이었습니다. 아벨의 제물은 정결했고 가인의 제물은 부정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것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아벨의 삶은 선했고 가인의 삶은 악한 것이 아니라 둘 다 죄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각 다른 사람, 다른 수준, 다른 삶, 다른 제물이 아니라 똑같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것은 받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죄인의 것을 받아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죄인이 드린 예물을 받아주셨다, 다른 표현으로 죄인들의 두려워하는 마음, 불안해하는 마음,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심정을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2. 가인의 반응, 아벨의 반응 하나님이 두 사람을 차별 대우하여 가인의 행동을 유발시킨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고, 아벨 또한 가인에게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죄인은 죄인이면서도 동료 죄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식이 변하여’, ‘아벨을 쳐 죽이니라’,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본문에는 아벨의 반응이 없지만 가인과 동일한 죄인이었던 아벨의 반응을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둘 다 받아주신 것이 아니고, 둘 다 받지 않으신 것도 아니고, 자신은 받아주시고 형 가인은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럴 때 느끼는 죄인들의 감정을 기고만장, 뿌듯함을 넘어 엄청난 우월감을 느끼고 한껏 교만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옳았고, 맞았다는 것을 인정받았으니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으시댔을 것입니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었을 때 한편으로는 기쁨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을 무시하고 깔보는 비웃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은 받고 가인은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받아주심으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반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동시에 가인이든 아벨이든 죄인 중의 한 사람의 반응을 보여줌으로 하나님과는 다르게 죄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 죄인이 가인이든 아벨이든 비록 외형적인 반응은 다르게 나올지라도 그 본질적인 태도와 자세는 전형적인 죄의 원리, 죄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3. 죄짐을 지기가 하나님의 첫 번째 질문은(창4:6~7)은 하나님이 전후 사정을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어쩌면 가인이 죄를 다스릴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당부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네가 너무나 뻔하게 분하여 하는구나, 네가 너무나 당연하게 안색이 변하는구나!’, ‘너는 죄를 다스려야하는데, 너는 못하는데, 쯔쯔쯔’이라고 안타까워하시며 죄인의 어쩔 수 없음을 아시고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가인이 분하여 하고 안색이 변하고 쳐죽이는 것은 각각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죄가 만들어내는 일련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두 번째 질문도(창4:9)도 질문이 아닌 것은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의 제사는 받아들여지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 죄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다른 어떤 형벌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가인은 죄에 사로잡혀서, 죄의 종노릇을 하면서 불행한 삶, 참담한 삶, 비극적인 삶을 당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하여 살인까지 하면서 점점 더 악화되어 가는 자신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다스려야하는데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의 폭주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짐은 하나님이 인간의 행동에 대해 심판과 징계와 형벌을 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결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