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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32] ‘하나님과 동행하며’ Ⅰ. 아담의 계보 1. 갈라치기 가인과 아벨의 제사 사건 이후로 기독교에서 치명적인 오해 또는 왜곡이 발생한 것이 인간을 가인의 계열과 셋의 계열로 나눈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복음서에서도, 서신서에서도 아담 이후로 인류가 두 계열로 나누어진다는 언급이 없고, 가인의 자손을 죄의 자손으로, 셋의 자손을 믿음의 자손으로 선언하지 않고, 두 후손은 본질상 다르다고 인간을 각각 다르게 취급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고,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인간의 생육하고 번성함이 이루어지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의 후손 중에 한쪽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한쪽은 포기하기로 작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시대를 넘어서, 초기 교회 시대를 넘어서,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지정이 되고, 기독교가 독점 종교가 되고, 기독교가 강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을 때 불행하게도 인간을 갈라치기하는 시도가 시작된 것은 기독교의 치명적 실수입니다. 복음은 인간이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때. 인간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기꺼이 육신을 입고 강림하셔서, 더 나아가 인간들의 생각에 모욕과 멸시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십자가의 죽음까지 감수하시고 그러나 부활하셔서 기어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어 인간이 다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다는 정말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인간에게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단 하나의 자격이나 조건도 따지지 않고, 단 한가지도 인간에게 요구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왜곡된 설명에 의하면, 은혜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단계가 많고, 장벽이 높습니다.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제한이 많고, 거쳐야 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구원받는 것이 로또에 당첨되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2. 셋, 셈, 이삭, 야곱 아담에게 가인과 아벨, 셋이라는 아들이 있는데 느닷없이 기독교가 인류는 가인의 계열과 셋의 계열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어났는데 가인의 계열(창4:16~24)에 포함되었고,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태어났는데 셋의 계열(창5:1:32)에 포함되었고 믿음의 자손이라는 계보에 속해 있어 구원의 대상,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셋의 자손이 이어지고 노아가 술취 해 실수한 사건(창9:18~29)과 관련하여 세 아들 즉 셈, 함, 야벳 중에 셈이 특별하게 분류가 됩니다. 셋의 후손일지라도 다시 갈라치기가 진행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무엇을 해야, 얼마나 해야 셈의 후손이 가능한지에 관한 내용이 아예 없으니 세상의 표현으로 하면 복불복입니다. 셋의 후손이요, 셈의 후손으로 기뻐하다가 아브라함에 이르러 하갈을 통해 장자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를 통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여기서 또 갈라치기가 발생하여 이스마엘은 안 되고 이삭이어야 한답니다. 힘 가진 분이, 결정권을 가진 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할 말이 없고, 대신 그렇게 하나님이 멋대로 계열이나, 계보니, 후손이니 일방적으로 결정하실 것이면 은혜니 선물이니 복이니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니, 모든 인간을 지으신 분이니, 유일하신 신이니 쓸데없는 말도 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갈라치기가 벌써 세 번째인데 끝이 아닙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에서와 야곱을 낳았습니다 둘 다 너무나 귀한 아브라함의 손자이고, 임신을 못하다가 겨우 얻은 금쪽같은 아들이고, 둘 다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형제로 소중한 이삭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셋의 후손이어도, 아무리 셈의 후손이어도, 아무리 이삭의 후손이어도 에서는 안 되고 야곱만 된답니다. 그 동안 셋의 후손이라고 기뻐했던 사람들, 셈의 자손이라고 복 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이삭의 계열이라고 안심했던 사람들은 모두 제외되었습니다. Ⅱ. 하나님과 동행하며 1. 하나님의 선택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이 여러 사람들 중에 특별히 그 사람을 선택하셨다’는 의미, 누구를 골랐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뽑았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발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선택에 대해 ‘누가 선택되었나?’라고 뽑힌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의 특징이나 장점을 늘어놓고, ‘이러니까 뽑혔지!’라고 합니다. 다른 편에서는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선택을 하신 적이 있느냐? 선발 공지를 하고, 자격이 되는 사람들이 공모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적이 없지않느냐? 그냥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알아서 뽑아버렸지 않냐? 이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항변합니다. 이때 기독교의 대답이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인데 전형적인 왜곡의 악순환입니다. 잘못된 설명, 잘못된 질문, 잘못된 주장이 반복됩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유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고, 선택과 유기의 기준을 설명하려고 ‘하나님의 예정’, 예정의 근거로 ‘하나님의 예지예정’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이 강조하는 것은 ‘너희가 하지 않기에 하나님이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선택하시고, 인간을 위해 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 누구를 골라서 그 사람에게만 혜택을 준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라, 인간 중에 아무도 자격이 있는 자가 없기에 아예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혜택을 주기로 하셨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표현에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선택’,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한다, 내 마음대로 한다, 내 뜻대로 한다, 내가 신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에게 꼭 필요한데 너희가 안하니까 너희가 못하니까 내가 대신 해 준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일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대상에서, 은혜의 대상에서 소외된 사람이 없기에, 포기된 사람이 없기에, 버려진 사람이 없기에, 유기된 사람이 없기에 이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반항하는 사람이 없고 거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강조해 주는 표현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삭에 대해 ‘선택의 아들’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고, 하나님이 이 아들을 통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내용들도 모두 하나님이 진행할 것이고, 하나님이 이루어내 실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부하여도, 가인이 아벨을 쳐 죽여도, 라멕이 인간을 향해 강포하게 굴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을 찾아와서 은혜를 베푸시고 생명을 보호해 주시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3.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창3장에서 인간이 죄를 범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이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3:8),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입니다. 그런데 에녹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창5:22, 24)가 두 번 반복해서 등장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어느 본문이든, 어느 사건이든 어떤 사람을 강조하거나 칭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든지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과 동행하시며,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을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약 에녹이 여느 죄인들과는 다르게 믿음 좋고, 신실하고, 충성스러워서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면 에녹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를 소개해 주어야 우리가 에녹을 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배울 수 있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에녹의 생각, 에녹의 태도, 에녹의 행동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했고, 하나님이 인간과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