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불교의 수행법, 불이중도, 팔정도, 위빠사나, 무위, 선지식 - '19.2.24 일요 정기법회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скачивания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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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무아, 자비, 중도, 무분별, 팔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무위법 특정한 사상, 철학, 관점, 논리, 진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이 중도 세속의 진리, 실천은 ‘옳은 것’을 실천하고 닦아가는 것, 출세간은 옳고 그른 것에서 벗어남 취사간택(분별, 의식, 망상)하지 않는 것이 곧 중도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곧 중도(팔정도의 정견, 사념처)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수용, 이것이 곧 중도요 자비 중도의 구현이 팔정도 – 말하고 생각, 행동, 삶사는 것이 곧 수행 불교 수행은 억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유위조작은 수행이 아니다. 훈습하는 공부 – 정법훈습, 염법훈습 무위법 - 하되 함이 없이 하라 선수행 – 좌선하지 말라는 선사 스님들의 말씀들 선지식을 찾는 것이 공부의 전부, 전법여행, 구법, 승가 [달마] 외도(外道)는 부처의 참뜻을 알지 못하기에 힘써 공부하는 것을 최고로 삼으니, 성인의 뜻과는 어긋난다. 본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경을 읽고 염불하고 늘 배우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하루 종일 도를 행하고, 늘 배우면서 앉아서 눕지 않고, 두루 배우고 많이 듣는 것을 불법으로 삼는다. 이러한 중생들은 모두가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제 이 땅에 와서 오직 돈교(頓敎) 대승(大乘)의 즉심시불(卽心是佛)만을 전할 뿐, 지계(持戒)나 보시(布施), 정진(精進)과 고행(苦行)은 말하지 않는다. “만약 본성을 보지 않더라도, 염불(念佛)하고 독경(讀經)하고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정진하고 널리 이로운 일을 한다면 성불(成佛)할 수 있습니까?” “성불할 수 없다.” “어찌하여 성불할 수 없습니까?” “얻을 수 있는 조그마한 법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이고 인과법(因果法)으로써 과보를 받는 것이니 곧 윤회(輪回)하는 법이다.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고서 어느 때 불도(佛道)를 이루겠는가?” [지공화상 대승찬] *대도불유행득(大道不由行得) 큰 도는 수행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닌데 설행권위범우(說行權爲凡愚) 수행을 말하는 것은 방편으로 어리석은 범부를 위해서다. [혜능 육조단경] 몸은 깨달음의 나무이며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으니 부지런히 털고 닦아 먼지가 붙지 않게 하라. - 신수(神秀)의 게송 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거울도 경대(鏡臺)가 없다. 본래 한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붙을 수 있겠는가. - 혜능의 게송 “무엇을 일러 좌선(坐禪)이라고 하는가? 이 법문에는 장애도 막힘도 없으니, 밖으로 모든 좋고 나쁜 경계를 당하더라도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일러 좌(坐)라고 하고, 안으로 자기 본성을 보아 마음이 부동한 것을 일러 선(禪)이라고 한다. 무엇을 일러 선정(禪定)이라고 하는가?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얽매이지 않는 것을 선(禪)이라 하고, 안으로 산란하지 않은 것이 정(定)이다. [영가현각 증도가] 학인 불요용수행 진성인적장위자 學人 不了用修行 眞成認賊將爲子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 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다. 예전엔 비틀거리며 헛된 수행하였음을 깨달으니 여러 해를 잘못 풍진객(風塵客) 노릇 하였구나. [마조어록(馬祖語錄)] 남악회양(南岳懷讓, 677~744)은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이 법기(法器)임을 알아차리고 물었다. “대덕은 무엇 때문에 좌선(坐禪)을 하는 것이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회양은 기왓장 하나를 가져와 그의 옆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도일이 물었다. “기왓장을 갈아서 무엇을 하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기왓장을 간다고 어찌 거울이 되겠습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그대는 좌선을 한다고 어찌 부처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가 끄는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는가? 아니면 소를 때려야 하는가?”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려고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려고 한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 머무르지 않는 법에서는 취사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대가 좌불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다.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깊은 이치에는 통하지 못할 것이다.” 도는 닦는 것이 아니다. 닦아서 이룬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는 것은 다시 무너질 것이니 이는 곧 성문(聲聞)과 같다. 그렇다고 닦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곧 범부와 같다. 본래부터 있던 것이 지금도 있을 뿐이니(本有今有),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은 필요치 않다. 수도나 좌선에 의지하지 않으면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더러움에 물들지만 말라.(道不用修 但莫汚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