У нас вы можете посмотреть бесплатно 석촌동 고분군이 서울 송파 한복판에 있었던 수백기의 고분 중 겨우겨우 살아남은 이유! или скачать в максимальном доступном качестве, видео которое было загружено на ютуб. Для загрузки выберите вариант из формы ниж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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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06 석촌동 고분군은 1911년 일제에 의해 처음 조사되었는데, 당시에도 한성백제의 무덤으로 인식되었다 00:00:14 1912년에도 간단한 조사가 있었는데, 당시 제작된 분포도에 따르면 무덤을 크게 갑총(甲塚)과 을총(乙塚)으로 나누어 표시해 놓았으며 갑총이 23기, 을총이 66기로 나타나고 있다 00:00:27 1916년 1917년에 정밀 조사가 있었으며 무덤에 대한 내부조사와 실측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00:00:36 특히 1917년 작성된 도면은 무덤의 위치와 대략적인 규모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제작되었는데, 자그마치 290여 기 이상의 무덤이 존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00:00:48 이 도면이 1917년 제작된 도면으로 거뭇하게 색칠된 것들이 모두 무덤이다 00:00:54 석촌(石村)이라는 지명의 유래도 일대에 돌무덤이 산재했기 때문이다 00:00:58 대부분의 문화유산처럼 석촌동 고분군 역시 광복 이후 사회적 혼란과 한국전쟁 등으로 사실상 잊혀졌다 00:01:06 그 결과 상당수의 무덤들이 흔적조차 없이 파묻혀서 사라졌다 00:01:10 그러다가 1975년 잠실 개발이 이루어지자 1974년부터 잔존해 있는 무덤들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87년 고분 위에 있었던 민가가 철거되면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00:01:25 이를 통해 매우 극소수의 무덤만이 겨우 세상으로 나와 고분 공원으로 재탄생되었다 00:01:31 지도의 왼쪽 부분에 1호, 2호, 3호, 4호, 5호분을 제외한 280여개의 무덤들이 제대로 된 조사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온갖 건물들 밑에 깔려버린 것이다 00:01:43 한성백제의 역사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들이 사라진 것이다 00:01:47 보통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지하까지 굴착하여 지반을 다진 후 건물을 올리게 된다 00:01:53 따라서 현재 건물들이 들어선 곳은 남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며,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형체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00:02:03 이 주변의 유적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건이 있었다 00:02:06 2015년 석촌동 고분공원 내에서 싱크홀이 발생하여 원인파악에 들어갔다 00:02:12 조사 결과 싱크홀이 아니라 우물 00:02:52 5호분은 현재 발굴조사 중이다. 고분군에서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된 봉토분이었다. 흙을 다져 봉긋하게 쌓았으며 그 위에 강돌과 막돌로 한 겹 덮은 다음, 다시 흙을 얇게 덮은 특이한 형식의 무덤으로 이를 즙석봉토분이라고 한다. 00:03:09 이 즙석봉토분의 계통에 대해서는 토착민의 무덤 양식에 즙석이라는 고구려적 요소가 가미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봉분을 만들고 지상에 주검을 안치하는 공간을 둔 마한의 전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00:03:23 00:04:03 1호분이다. 북분과 남분이 서로 붙어있는 연접묘로 길이가 22.3미터이다. 북분과 남분은 축조방식의 차이가 확인되는데 북분은 고구려 돌무지 무덤(적석총)의 축조방식을 따르지만, 남분은 백제화된 돌무지 무덤의 축조방식을 따르고 있다. 00:04:21 남분과 북분이 판축기단부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사자는 남분의 북벽이 정연하지 못한 점을 근거로 북분이 먼저 축조되고, 남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남분 서쪽과 남쪽, 그리고 북분의 북쪽에 모종의 이유로 적석기단이 추가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북분의 북서벽에는 1호 석곽묘가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남분의 남쪽에 위치한 3호 석곽묘가 1호분과 거의 붙은 상태로 조사되었다. 00:04:51 북분은 내부를 할석으로 채운 이른바 고구려식 적석총이며, 후에 축조된 남분은 속이 점토부로 된 백제식 적석총이다. 00:05:00 1호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길이 4센티 정도의 귀이개로 보이는 은제품과 승문타날 심발형토기 저부가 있다. 1호분에서는 연대를 특정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대신에 북분의 상부에 축조된 1호 석곽묘에서 비교적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 1호 석곽묘의 축조연대가 1호분의 하한연대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유물군에 대해서는 대체로 4세기 중엽으로 비정되는 듯 하며, 따라서 1호분의 연대는 4세기 중엽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00:05:35 1호분 00:05:53 제3호 움무덤. 이거 얘기하는거죠? 아씨 이거는 너무했다 그냥 세멘구덩이. 그냥 위치표시 정도. 콘크리트 시대의 추억입니다. 00:06:24 발굴조사 중인 곳이다. 2015년에 씽크홀이 발견된 바로 그곳이다. 00:06:29 1호분과 2호분 사이 잔디밭이었던 이곳에 직경 50센티미터의 구덩이가 생겼고, 그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긴급 시굴조사를 시작했었다. 00:06:40 구덩이는 우물이었고 나무로 짠 구조물이 있었다. 00:06:45 조사는 계속되었고 수십점의 토기와 기와, 유리구슬 등 백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00:06:52 2015년 10월, 다시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백제왕실의 진귀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00:07:00 2016년 8월, 조사구역의 남쪽에서 금동귀걸이가 출토되었다. 00:07:06 이 유적은 지금도 계속 조사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덮여있는 모습을 보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엄청난 유적이었군요. 역시 백제왕실의 고분군 답습니다. 00:07:21 00:07:24 2호분입니다. 겉모습은 돌무지무덤이고 내부는 흙이 채워져있다. 내부에 흙을 채우고 겉에만 돌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서북쪽 모서리에서 나무널 1기가 발견되었는데, 움을 파지 않고 널을 놓은 뒤 작은 봉분을 만든 것이었다. 이를 통해 흙무지 널무덤을 먼저 만들고 나중에 확장했음을 알 수 있다. 널무덤과 서남쪽 봉분 안에서 3세기 말에 만든 굽다리 접시와 굳은입 항아리가 출토되었다. 00:07:57 발굴 조사 이전에는 높이 3에서 4미터의 타원형 봉분이 잔존하고 있었다. 00:08:05 00:08:10 4호분이다. 맨 아랫단의 길이가 17미터 가량인 사각형의 3단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내부는 흙으로 채워져있어서 전통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과는 다른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부르기도 한다. 00:08:24 1974년 조사에서 맨위 3단에서 정사각형 돌방과 윤곽만 상징적으로 설치한 널길을 조사했는데, 84년 재조사에서 원래 진흙을 다져 쌓은 흙무지무덤을 겉모습만 돌무지무덤으로 바꾼 것으로 확인하였다. 00:08:40 주검을 묻은 흔적은 흙을 다져 쌓은 지점 3군데에서 따로 따로 확인되었다 00:08:45 무덤 안에서 특별한 유물이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돌무지 속에서 벽돌, 토기, 기와 등의 조각이 발견되었다 00:08:53 돌을 쌓은 방식으로 보아 돌방무덤을 만들려고 한 것으로, 4세기 5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정된다 00:09:00 3호분은 동서 방향 50.8미터 남북 방향 48.4미터로 추정되는 사각형의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산에서 가져온 큰 돌을 깨서 3단 이상 쌓았는데, 1980년대 중반까지 여러 채의 민가가 무엄 위에 있었기 때문에 무덤의 높이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최소 4.5미터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00:09:23 무덤은 땅을 잘 고른 후 40에서 50센티미터 두께로 진흙을 깔아 다지고 그 위에 자갈돌과 지댓돌을 차례로 깔았다. 이후 대체로 40센티미터가 넘는 크기의 깬돌과 작은 판자들을 가로 누여서 층층이 쌓아 올렸다. 00:09:40 무덤이 훼손된 뒤에 발굴되었기 때문에 주검이 묻힌 곳은 찾지 못했으나, 무덤 주위에서 중국 동진 시대의 도자기 조각, 금으로 만든 얇은 장식 조각인 달개, 백제 토기 조각 등을 수습하였다. 4세기 5세기의 백제 왕릉으로 보이며 학계에서는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00:12:15 00:12:20 석촌동 고분군 안내판 00:12:25 00:12:30 석촌동 고분군 안내도 00:12:35 00:12:43 3호분 안내판 00:12:55 00:13:09 4호분 00:13:12 4호분 안내판 00:13:19 4호분 00:13:38 2호분 00:14:05 2호분안내판 00:14:07 00:14:11 2호 움무덤 안내판 00:14:14 2호 움무덤 00:14:24 00:14:53 석촌동의 돌 이야기. 석촌동 고분군의 돌들은 석촌동 주변의 산지와 한강에서 가져온 편마암과 규암이라고 합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고 하네요. '욱리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 묘곽을 만들어 선왕의 뼈를 묻었다.' 00:15:12 발굴 현장 00:15:26 내원외방향 돌무지무덤 안내판. 외방내원형 적석총이라고도 한다. 신라 무덤에서 볼 수 잇는 둘레돌인 호석처럼 안쪽에 둥근 원모양으로 열을 지은 깬돌이 봉분 자락에 놓여 있었다. 그 바깥의 자갈돌과 네모 모양으로 열을 지어 가지런히 놓인 테두리의 깬돌은 주변 1 2 3 4호분처럼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00:15:49 무덤 안과 밖에서 토기, 손칼, 쇠못, 꺽쇠 등의 철기가 많이 출토되었지만 모두 교란층이어서 관련 유물인지는 면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00:15:59 00:16:04 석촌동 고분군의 최초 형성 시기는 3세기 후엽 정도로 추정되고 있으며, 적석총의 축조 연대는 고구려 적석총 구조적 상관성으로 볼 때 4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00:16:16 따라서 온조, 비류 집단의 남하가 사실이라면 그 연대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가 될 가능성이 높아 삼국사기의 남하 및 건국 연대와는 300년 가까운 차이가 나게 된다 00:16:28 하지만 개발과정에서 수많은 고분들이 소실되었기도 하고 3세기 이전에도 백제국의 존재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존재하기 때문에 3세기말로 백제의 건국(혹은 온조의 남하)을 단정짓는것 역시 무리가 따른다 00:16:43 또한 3세기에 쓰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도 이미 마한 54개국 가운데 백제국의 존재가 드러나기 때문에 3세기말 ~ 4세기초 건국 주장의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00:16:54 다만 백제 건국을 한강 유역 정착과는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으므로 그럴 경우 3세기 무렵의 풍납토성 정착 역시도 절충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편이다 00:17:05 이상의 내용은 현장의 문화재안내판, 나무위키에서 많이 참고 하였다 00:17:10 영상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