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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 부탁드립니다. #메타인지학습법 매주 주일 오전 6시 송인설 목사의 원포인트 설교가 업로드 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요한복음 1:1-3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안녕하세요. 카리스 메타 교육원 원장 송인설 목사입니다. 전도서 1:2절에서 전도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헛되다는 게 무엇일까요? 오늘은 우선 삶의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 보려 합니다. 노인요양소에서 개 고양이 앵무새 토끼 암탉을 기르게 했더니 사망률이 뚝 떨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살 이유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얘기지요. 오늘은 “어떻게 의미 있게 살 수 있을까?”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1] 모든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팀 켈러는 [답이 되는 기독교]에서 “의미”에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배후에 의도가 있으면 유의미하다고 합니다. 폭행 사건이 생겼을 때 우선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였는가?’ 묻습니다. 둘째, 자체 너머의 무엇을 가리키는 중요한 내용이 있으면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훈장은 의무감 이상의 뛰어넘는 용기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20세기 중반 실존주의 작가들이 특별히 삶의 의미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였지요. 장 폴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쓸모없는 열정이다.”라고 했다고 하지요. [2] 그런데 삶의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각자 알아서 삶의 의미를 지어내어 살라고 하지요. 하버드의 진화생물학자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1941-2002)도 그랬습니다. 삶의 의미란 없다. 이 사실이 두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은 해방을 가져다준다. 해답은 우리 스스로 궁리해야 한다. 삶의 궁극적 의미가 없다고 믿는 게 해방이다. 근대 시대에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고 슬퍼했으나, 포스트모던 시대 우리는 삶의 의미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져서 후련하다.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지어내라. 팀 켈러는 반대합니다. “삶이란 해석하기 나름이 아니다. 삶은 있는 그대로다. 우리에게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완전한 자유가 없다. 삶을 존중해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 부합하는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 덩치가 작은 학생이 프로 풋볼 선수가 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삶에서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면 삶에서 있는 그 대로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여러 종교와 여러 사상이 여러 가지 삶의 배후 질서에 대해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백가쟁명의 사상가들이 수도 없이 많이 나왔습니다. [3]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성경은 독특한 얘기를 합니다. 세상을 만든 분이 있고 그분이 세상의 질서와 법칙을 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은 삶의 의미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하늘 아버지의 통치를 이 땅에서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서 지독한 삶의 무의미를 경험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외치셨습니다. 시편 22:1편을 암송하며 믿음으로 하나님 없는 무의미를 견디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삶의 무의미 속에서 방황하고 고통 받는 우리 대신 삶의 무의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돼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하나님과 분리되어 무의미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리스도인은 생명만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삶의 영원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영혼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살 이유를 찾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시작하신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주의 로고스, 삶의 원리까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의미만 받을 뿐만 아니라 삶의 원리까지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 1:1-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로고스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본래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우주의 법, 이치, 우주의 배후 의미라고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이지요. 사도 요한은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으로 드러나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데요. 하나님이 창조 때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왕국을 통치하는 원리와 법칙을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이유,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거기에 더하여 삶의 원ㄹ,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까지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이런 원리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섬기는 자가 큰 자다. 심은 대로 거둔다. 받고 싶으면 주어라. 주면 더 받는다. 앞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이런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들을 많이 배워보도록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을 열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삶의 원리도 배울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