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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의 한국어 공부방 생각하기 이해하기 실천하기 사상과 철학 251 655. 몸과 싸우지 마라. 몸에게 묻고 그것과 함께 떠돌아 다녀라. 세계는 당신의 몸이다. 단지 강과 함께 흘러가라. 삶이라는 것은 자신이 구하는 것을 얻으려고 기대하면 하나의 사기이다. 기대하거나 구하거나 욕망하기 시작하면 갖가지 문제를 만들게 된다. 거기에 트러블이, 병이, 노이로제가 생긴다. 그러한 모든 종류의 불안이 당신 속에서 솟아 나온다. 당신이 무엇이든 자신이 얻은 것을 좋아하면 원활해진다. 그것을 좋아하고 즐기고 환희하고 수용하라. 그러면 삶은 멋지고 원활해진다. 그것은 경쾌한 콧노래를 타고 움직여 준다. 실제로 당신이 얻은 것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다. 만일 삶의 비밀의 매커니즘을 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얻은 것은 언젠가 어디에서, 과거의 뭔가의 시점에서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것을 좋아해 보라. 그러면 아무런 트러블도 문제도 불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폭력적인 사람이 비폭력적으로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그 노력 속에 폭력이 있는 것이다. 성욕을 가진 사람이 금욕자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도착된 성욕일 뿐이다. 당신의 성욕을 수용하라. 그것과 싸우지 마라. 그것을 즐기고 환희하고 참여해보라. 그것은 삶의 일부인 것이다. 만일 전체가 성욕을 주었다면 그것에는 뭔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즐기는 것이 좋다. 불평을 하지 마라.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그 속에서 환희하는 것을 통하여 이해가 성숙하여 자신이 그것을 초월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단지 수용만이 이해를 부여해 준다. 만일 거절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그 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떻게 적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나의 존재 속에서 환희하고 있을 때 당신은 우호적이다. 공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해가 가능해진다. 의미라는 것은 마음의 창작인 것이다. 삶이나 존재에는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숨겨진 의미 같은 것은 없다. 그것을 발견했을 때 당신은 깨닫는다. 스승이란 성취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당신들은 모두 달성하려는 사람들이다. 달성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눈은 볼 수가 있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당신의 눈은 편견과 갖가지 사고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해는 모두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은 회전하기 시작하여 하나의 해석을 만들어 낸다. 완전한 인간은 결코 완전주의자가 아니고 완전주의자는 결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완전한 인간은 토털이다. 완전주의자는 단편적이다. 단지 토털한 삶만이 완전할 수 있는 것이다. 악마는 하느님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악마가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악마는 하느님에 대립된 행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그 드라마 전체의 일부분이다. 악마도 편입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것을 부정하면 당신 속의 일부가 부정되어 버리게 된다. 더구나 그것은 당신의 절반인 것이다. 만일 분노나 미움을 부정하면 당신 실존의 절반이 부정되어 버리게 된다. 그러면 낮밖에 수용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나 밤이라는 것도 확실히 있다. 그리고 밤은 무의식 속에 억눌린 채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성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보면 죄인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욕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섹스를 꿈꾸고 있다. 밤이나 낮이나 모든 것이 다 불멸이고 영원한 것이다. 낮과 밤이 그 있어야 할 모습으로 만나고, 용해되고 하나로 되면 세 번째 타입의 존재가 모습을 나타낸다. 조화있는 온화한 균형이 취해진 낮과 밤의 어느 쪽과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반대적인 것, 두 개의 만남에서 나오는 세 번째 타입의 존재이다. 산소와 수소가 만나면 물이 생긴다. 물은 산소나 수소하고도 전혀 다르다. 물은 하나의 새로운 존재이다. 물은 실존의 새로운 모습이다. 갈증은 산소나 수소로 해소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물의 성질은 수소 속에도 산소 속에도 없기 때문이다. 물의 성질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 하나의 하모니인 것이다. 수소와 산소가 어떤 일정한 비율로 만났을 때 갈증을 푸는 그 성질이 나타나게 된다. 도는 낮과 밤이 일정한 비율로 만나는 데 있다. 악마와 하느님, 어둠과 빛, 여름과 겨울, 삶과 죽음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하모니를 만들어 내서 세 번째 성질이 나타나도록 하느냐에 있다. 그것이 브라만이고 道인 것이다. 그러나 높은 것은 낮은 것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다. 뿌리는 나무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의 일은 불가능하다. 낮은 것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채워졌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은 낮은 것이 박멸되었을 때가 아니라 초월되었을 때에 한한다. 전체성의 사람은 거기에 낮은 것이 있는 것을 허용한다. 그것은 높은 것이 거기에 있는 것도 허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낮은 것과 높은 것 사이에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어 낸다. 그 하모니 속에서는 그것들은 하나가, 통일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토털한 인간이 당신의 눈에 비치면 그를 불완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거기에 자기 자신 속에 바라지 않는 많은 것이 있는 것을 목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토털한 인간 속에서는 때때로 분노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자비의 성질이 있다. 당신도 분노를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자비는 없고 폭력적인 것이 들어있다. 만일 발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머리만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유기적인 통일체라면 어떻게 일부분만이 깨달음에 들어가고 다른 부분을 뒤에 남겨둘 수가 있겠는가? 존재라는 것은 한 몸이다. 몸은 당신을 모른다. 모든 산야신들은 심각하다. 그들에게는 웃음이 없다.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고 있다. 실제로 그들은 겁쟁이, 도피자인 것이다. 만일 세상이 정말로 하나의 환각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도피하는가? 만일 실제로 전세계가 환각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만일 그것이 게임이라면 그것을 즐겨라. 그것에 매달리지 마라. 그것에 대해서 미치광이가 되지 마라. 그것은 게임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지식이 아니다. 認識이다. 지식은 마음의 것이고 인식은 실존의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과거의 것이고 당신에게 들러붙은 때와 같은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다고 말한 순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 된다. 인식은 항상 지금 여기, 현재이다. 인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인식될 수 있을 뿐이다. 인식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지식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현재라는 것은 시간의 일부가 아니다. 영원의 일부이다. 그것은 영원과 순간이 만나는 교차점이다. 시간은 과거와 미래일 뿐이다. 그리고 지식이 미래를 만들어 낸다. 과거가 미래를 낳고 미래는 과거의 부산물이다. 뭔가를 알면, 반드시 계획하기 시작한다. 안다는 것은 과거를 의미하고 계획이라는 것은 미래를 의미한다. 그러면 미래에 자유를 허용하지 않게 된다. 당신은 그것을 과거의 정리 상자에 억지로 쑤셔 넣으려고 한다. 그것이 단순한 과거의 되풀이이기를 원한다. 아무리 수정되고 장식되어 있다 하더라도 단지 과거의 되풀이이다. 지식인이란 계획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삶이라는 것은 계획될 수 없는 흐름인 것이다. 삶은 분류되지 않는 자유인 것이다. 지식인은 단지 표면뿐이고 아무런 깊이도 없다. 깊이는 영원을 통해서 찾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미래를 낳고 미래가 걱정을 낳는다. 많이 알수록 그만큼 걱정하게 된다. 인식은 아는 것이고 지각이고 비전이고 성장이다. 지식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부처나 예수로부터 쓰레기같은 것만을 주워 모으고 있다. 지식인은 그 사람들을 믿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죽어 있다. 지식인은 타인으로부터 지식을 긁어모아 빌려온 것 뿐이다. 어떻게 인식을, 실존을 빌릴 수 있겠는가? 인식은 영원 속으로의 부활, 시간에서의 이탈, 그리고 무시간으로의 윤회이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어딘가로 갈 필요가 없다. 만일 자기 자신을 알고 있다면 전 인류를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폭력을 알면 모든 폭력을 알고 있다. 한 번도 쓰여져 있지 않은 것,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그것까지도 알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야말로 씨앗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서 한 방울의 바닷물을 꺼내는 것과 같다. 그 물방울 속에는 바다 전체가 응축되어 있다. 그것은 바다의 미니어처인 것이다. 당신은 원자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당신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세계에서는 보다 큰 스케일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이해함으로써 사람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 밖으로(지식) 나가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다만 그것은 2차적인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직접 접촉하고자 한다면 모든 문이나 창문(감각)을 닫고 내면으로 들어가라. 모든 과학의 이론은 쓰레기통 행의 운명에 놓여 있다. 수많은 이론은 호수에 비친 영상이지 진짜 달이 아니다. 진짜 달은 내면에 있다. 당신이 추할 때는 모든 장미꽃이 추해진다. 슬플 때는 모든 달이 슬퍼진다. 당신은 자기 주위에 현실을 만들어 내고 투영한다. 당신은 내면에 창조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앎으로써 일체를 알 수 있다. 아름다움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내면에서의 유출이다. 아름다운 것은 장미꽃이 아니다. 당신이 그 주위에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장미꽃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에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은 당신인 것이다. 삶은 당신이 그것에 의미를 가져다 주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삶 자체 속에는 의미같은 것이 없다. 의미는 그것에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의 실존을 삶에 주입하면 삶은 의미를 갖고 맥박이 뛰기 시작한다. 그럴 때야말로 삶은 노래하고 춤춘다. 그리고 성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 나머지 교재와 풍경 사진은 티스토리를 확인하세요~! 티스토리 주소 : https://paradigm21.tistory.com/387